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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생 Oct 30. 2022

과알못의 과학책 읽기

심해 생물에 대한 관심이 생긴 후 종종 과학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좀 나쁜 버릇인지 아니면 많이들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주로 있어 보이는 책을 사서 결국은 책장 장식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덕분에 지금 내 책장은 한 두 페이지 읽다 덮거나 펼치지 않은 책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책장의 규모가 한동안 정체되고 야금야금 읽어 그나마 절반 정도가 됐다. 그럼에도, 사실은 찔리지만, 애써 합리화를 해본다. 책장이 포화상태이거나 이사를 할 때 살아남는 책들은 결국 아끼는 몇이나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들이 책장에 남겨질 가능성이 높다. 책들은 어쩌면 그 아이러니를 생존전략으로 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집에선 그렇다. 나는 읽지 않음으로써 책을 살리고 있다고 우겨본다. 어렵고 지루해 손이 가진 않지만 소장하는 것으로도 지적 만족을 주는 책 한 두권 정도는 세상 누구의 책장에서라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내 경우에는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책장에 안 읽은 책들이 많아지는 건 애초에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구입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야 공간 부족 등을 이유로 자제하거나 전자책을 구입하지만, 예전엔 보통 다섯 권쯤 사면 두 세권 정도는 당장 읽을 의지가 없는 책들이었다. 당장 읽지도 않을 책을 사들이는 건 허영에 찬 책장을 꾸미기 위해서, 혹은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독서력은 낮고 그렇지만 언젠가 읽고 싶고 알고 싶은 주제인데 지금 사두지 않으면 까맣게 잊어 그 언젠가의 기회를 영영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가끔은 좋은 선택이었고 주로 허울 좋은 핑계였지만 그 가끔 때문에 쌓여있는 책들에 대해 대한 부담을 던다. 그런 나쁜 습관이 아니었다면 600페이지가 넘는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2006년에 출간된 평행우주를 언제 어쩌다 알게 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나 메일링 서비스로 알게 됐던 것 같다. 그때까지도 과학책은 생물이나 뇌과학에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은 게 다였다. 물리학이나 천문학 관련 책은 아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읽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유명하고 입문 성격을 띠는 과학책은 너무들 두껍다. 그러니 읽었더라면 분명 기억할 것이다. 어렵고 두꺼운 책의 내용은 기억 못 해도 읽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하는 것이 내 허영에 대한 예의니까. 그리고 지금 평행우주 대신 그 책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과학이 정말 나와 맞지 않는다며 관심을 거뒀을지도 모른다. 평행우주 이론에 따르면 다른 책을 읽었거나 다른 책을 읽으려다 실패해 과학에 등을 돌린 내가 각각의 우주에 존재할 것이다. 그 우주의 나들. 그리고 무수히 분화된 우주에 사는 나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평행우주를 읽던 때의 나와 달리 지금의 나는 평행우주, 그러니까 다세계 이론이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내 선호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우주는 유일한 'Uni'verse 거나 무수한 'Multi'verse일 것이다. (아니면 홀로그램일까?) 혹 내가 존재하는 동안 다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자들이 알아내면 나는 그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알고 싶어 하다가 어느 날은 이해한 것 같지만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 채 부재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수학을 못 하니까. 이해하려면 수학이 필요할 테니까. 그날이 오면 어느 우주에는 완전히 이해한 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믿고 그 나를 응원이나 해야지.

 아무튼 이 우주의 나는 오래전 어느 날 평행우주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매혹적인 책 소개에 넘어가 버렸다. 이런 건 한 번쯤 꼭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 치고는 다 읽는데 1년 6개월도 더 걸렸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하나씩 찾아보느라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몇 페이지 읽다 몇 달을 묵혀두고 또 얼마간 읽다 잊은 듯 살다 보니 그랬다. 간헐적 독서의 문제점은 앞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얼마 없었다. 그저 가름끈의 표식을 믿고 그 페이지를 열어 앞부분은 잊은 채 얼마간 글씨를 읽다 덮었다. 그렇게 다 읽었다.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글자들의 나열을 보았다. 책 내용의 약 20% 정도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말에 조사가 많았다. 주어와 서술어는 자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사람 이름이 나오면 사람인가 보다 하면 됐고 '입증되었다', '결론이 내려졌다' 같은 일반적인 서술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뭘 입증했다는지 어떤 결론이 내려졌다는 지는 잘 몰라도 뭐가 입증됐고 어떤 결론이 났구나 끄덕. 그 정도면 한 문장에 20% 정도는 알아 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많지 않았다. 대중을 위한 책이었지만 관련 지식이 전무하던 내게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싶었다. 앞부분만 읽다 던져버린 책들이 책꽂이에 많이 꽂혀 있을 만큼 책을 읽다 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적었지만 읽다 만 책으로 남기기는 싫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릴적 나는 '낭만'이라는 단어를 극도로 싫어했다. 모든 자음이 울림소리인 콧소리(비음)이고 모음 역시 극 외향인 'ㅏ'로 이루어져 있는 단어가 뜻까지 그러하니 헤벌레 정신을 못 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뜻을 가진 단어라면 적어도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 중 하나는 가지고 있거나 모음이라도 약간 단조 같은 느낌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단어는 받침마저 'ㅇ'이 들어가 있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주는 낭만적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자주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낭만이라는 단어는 광활한 우주에 붙이기 위해 그토록 한없이 과한 것 같았다. 우주는 그 너무함조차 충분히 품을 수 있었다. 검은 우주와 별, 고요. 더 내려갈 수 있는 온도조차 얼마 남지 않은 차디 찬 우주가 왜 따뜻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졌을까. 우주의 신비를 알아내기 위해 이론 정립과 실험을 반복하는 과학자들의 치열함조차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우주는 낭만이었다. 낭만이라는 단어의 느낌이 내게 재정립되는 시간이었다. 그토록 거대하고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품 같은 게 존재한다면 낭만이라는 단어는 쓰여도 될 것 같았다. 

 오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검은 고양이를 쓴 미국의 작가 에드거 앨렌 포의 이야기였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때까지 과학자들이 풀지 못했던 올베르스의 역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한다. 하늘에 별이 무수히 많은데 왜 밤하늘은 어두운가에 대한 오랜 물음에 별빛이 다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쓴 포의 산문 일부가 책에 나와 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나는 어두운 밤하늘에 의문을 가졌던 올베르스의 역설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은 당연히 어두운 것이었다. 사는 내내 그래 왔고 그게 밤이니까. 그렇지만 당대 과학자들은 그 의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답을 내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이 우주를 무한하고 균일한 것으로 여겼다는 내용이 책에 분명히 있었음에도 그 한계가 올베르스의 역설을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10년 정도 후에나 깨달았다.

 에드거 앨렌 포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것은 천문학자도 아닌 사람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그 직관의 깊이를 가늠할 능력이 그때도 지금도 없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다음이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틀렸을 리가 없다"라고 자신했다는 부분. 책에서도 따옴표로 표현된 저 문장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매료되었다. 그것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1800년대 에드거 앨런 포의 기쁨과 환희, 희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생, 그 순간에 대해 나는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냉정히 따져보면 평행우주는 내 수준에 전혀 맞지 않는 책이었다. 신비와 경이도 있었지만 많은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책을 다 덮은 후 나는 과연 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고집을 부리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보려는 것일까? 그저 읽었다라는 허영을 위함인가 같은 생각들에 집중을 더 못하던 순간들도 있었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사이 취미 삼아 과학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과학책은 여전히 어렵다. 아직도 자주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이런 독서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허무에 빠져있는 시간이 독서시간보다 길 때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내용은 파악하지 못하고 글씨의 나열만 감상하는 경우도 많다. 얼마 전에는 작정하고 집중을 해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내용 앞에서 나쁜 생활습관과 세월로 인해 지능이 낮아진 것인가 하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어느 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이었는데 다행히 이해하기 어려운 챕터였다는 전문가의 말에 안도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게 두껍고 내게 어려운 과학책을 겁 없이 사거나 펼쳐본다. 그것은 분명 온갖 자괴감 속에서도 평행우주를 끝까지 읽어냈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책을 다 읽고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그 지식을 모두 다 알고 이해하는 건 일반인인 내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론에 대한 이해는 못했을지 몰라도 우주의 경이와 신비를 감각하고 환호할 수 있게는 해주었다. 아마 저자도 내 수준의 독자에게 그 이상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결코 과학자들만큼 지식을 쌓을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거나 도전에 성공했을 때 그것을 기다리던 과학자들과 함께 환호할 자신은 생겼다. 물론 먼발치에서,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지만.

 가끔 이상한 경험도 했었는데 즐겨 듣는 과학 팟캐스트를 들을 때면 어쩐지 평행우주 책에서 봤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책을 읽던 당시에는 방금 전에 읽었던 부분도 기억나지 않고 생소했는데 수년이 지나서, 심지어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책에서 읽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기분 탓인지 무의식의 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서로 보완하며 쌓여가는 것 같다. 실로 책을 훌훌 넘기다 보면 당시엔 초면이었고 바로 휘발되는 것 같았던 과학자들의 이름이 익숙해져 눈에 띈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 1년 3개월 전에 시작한 600페이지의 책을 아직까지도 77% 밖에 읽지 못했고 77%나 읽었지만 기억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거의 없는 것만 같은 나를 위한 복기다. 이런 한심해 보이는 독서도 있고 그렇지만 그게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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