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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람 Nov 07. 2022

좋은 엄마

<침몰가족>을 읽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이의 몸무게나 발달 정도, 숫자나 글자를 외우는지 못 외우는지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서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는 그런 것이었다. 아이의 성과에 연연하기보다 어떤 사람으로 자랄지를 더 염두에 두는 엄마. 그렇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엄마. 그러나 나는 종종 혼란에 빠지곤 한다. 정말로 그거면 되는 것일까. 혹시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침몰가족>이란 일본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비혼 싱글맘의 공동육아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책으로 다큐멘터리로 먼저 제작된 것을 글로 풀어낸 것이다. 감독이 자신의 엄마 이야기를 옮긴 것인데 이 엄마의 행보가 몹시 인상적이다. 결혼하지 않고서 아이를 혼자 키우기로 결심한 엄마가 함께 육아할 사람을 찾기 위해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준다. 전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공동?) 육아 참가자 모집 중

나는 쓰치를 만나고 싶어서 낳았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종일 가족만 생각하느라 타인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살다가 아이는 물론 나 자신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공동육아라는 말에서 공동은 대체 무엇이고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아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등 아이와 지내다 보면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 책을 권해준 지인은 “나는 쓰치를 만나고 싶어서 낳았습니다.”, 이 문장을 참 좋아했다. 쓰치의 엄마는 쓰치와 만나고 싶어서 아이를 낳았고, 또 떨어져 있고 싶어 공동육아를 선택했다고, 좋은 육아는 아이와 제대로 만나는 것이고,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내 살을 맞대고 있기보다 조금 떨어져서 인간 대 인간으로 대면해야 한다고. 아이가 독립된 개체임을 인정하고서,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아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고. 어차피 아이는 내가 이끄는 대로 자랄 것이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이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이와 만나는 것, 아이를 제대로 보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과연 아이와 제대로 만나고 있는 것일까. 아이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에는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 시기에 맞춰 엽산이라든지 칼슘, 비타민 디를 챙겨 먹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한 일이 없었고, 그럼에도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잘 자랐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는데 정말로 잘 돌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아이는 작고 연약했다. 아이에게서 눈을 떼는 잠깐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수도 없이 들어왔던 터라 더욱더 겁이 났다. 아이가 무사히 자라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분유의 온도, 먹여서는 안 되는 음식을 확인했다. 잠을 잘 때면 부드러운 침구류에 파묻히지 않도록 주의했다. 침대에서 고꾸라지지는 않는지, 걷다가 뒤로 넘어가지는 않는지 신경 썼다. 나는 아이의 보호자이자 대변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아이가 부쩍 자란 지금은 이전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돌보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주보호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이와 제대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이와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만난다기보다 보호자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마 이 생각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아이와 어느 정도 말이 통하지만 원활한 소통은 어렵기 때문에 제대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이가 어리거나 제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사람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럼 나는 왜 아이와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때로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너무 아끼는 것은 아닐까. 나의 다섯 살 시절을 생각해보면 엄마 없이 동네 언니 오빠 들과 뛰노는 장면이 떠오르는데 아이는 꼭 내 손을 붙잡고서 내 눈앞에서만 다니도록 한다.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떠먹여주기도 한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때로는 내가 아이를 강아지처럼, 고양이처럼 귀여워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아이와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거겠지.


언젠가 앞서의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이람 씨는 가끔 아이가 어리고 귀엽다는 이유로 다 포용하려는 경우가 있어요. 뜨끔했다. 나는 아이를 믿고 기다려주는 엄마, 채근하지 않는 엄마, 말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엄마, 여하튼 이런 결을 가진 엄마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행동하려 노력했는데 그러다 보니 때때로 아이를 단호히 가르쳐야 하는 순간까지 웃어넘겨버리고는 했다.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아이니까 가르쳐야 했는데 그걸 종종 잊었다. 언젠가는 우리 집에 놀러 온 제부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난 처형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아 전문가인 줄 알았잖아요. 어쩜 그렇게 화를 안 내요?”


제부의 칭찬에 당혹감을 느꼈다.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아이에게 좋기만 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났는데 화나지 않은 척 꾹꾹 참는 모습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이보다야 이성적이겠지만 나 또한 아이처럼 다양한 감정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고, 나의 감정을 정제함으로써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해주는 보호막이 되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솔직하게 대해야 했는데 그 말은 내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부는 나를 한없이 자애로운 보호자로 보고 있었다. 나는 결단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이를 제대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제부 또한 나를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을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여도 정도를 알아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지금은 좀 나아졌는가. 잘 모르겠다. 여전히 좋은 엄마, 아니,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좋은 사람에 대한 나름의 기준이 생겼지만 지키지 않을 때가 많다. 아이한테도 그렇다. 아이가 스스로 하도록 지켜봐야지 싶다가도 답답한 마음에 손을 뻗기도 하고, 아이를 너무 감정적으로 혼낸 것은 아닌지, 아이에게 가르쳐줘야 할 것을 잊은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내가 아이와 제대로 만났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아이를 제대로 만나려고 노력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아이와 제대로 마주 보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렇게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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