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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람 Nov 12. 2022

세 번째 고비

과호흡이 왔다

아이는 2021,  살이 되어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갔다. 전해에도 어린이집 등록은 하였으나 코로나 때문에 3월이  지나도록  번도 등원하지 못했다. 4 중순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등원을 하더라도 마음을 졸일 것만 같아 결국 어린이집 등록을 취소하였는데 등록하든 등록하지 않든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였으므로 그럴 바엔 양육 수당을 받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어린이집에 등록해놓으면 양육 수당이 보육료로 전환되었다). 그런 고로 아이는  살을 온전히 나와 보내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 코로나에 잔뜩 겁먹었던 때였어서 문화센터에  생각은 꿈도  꾸었고 사람 없는 동네를 산책하며  년을 보냈다. 아이가  살이 되었다.  살에는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으나 코로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것만 같았다. 2021 3, 아이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그러나 코로나 4차가 유행하면서 맞벌이 가정이 아니면 등원을 자제해달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아이도 7월부터 등원하지 않았다. 그때엔 너무 겁이 났었다. 비이성적인 공포심에 빠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혹여 코로나에 걸릴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나에서 안전한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집.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그 꽉 막힌 굴 같은 데에서 우리는 책을 읽으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퍼즐을 맞추며,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가끔은 이전처럼 공원으로 외출했다. 때때로 아이가 언제 등원할지 묻는 선생의 전화가 왔지만 대개는 당분간 데리고 있겠다고 답했다.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전해에는 일 년 내내 데리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마음으로 아이와 시간을 보냈고, 물론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10월 중순에 아이는 어린이집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확진자 수가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세 살 때처럼 결정해야 했다. 또 한 번 어린이집을 관둘 것인가, 아님 다시 보낼 것인가. 이번에는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래야만 하는 일이 9월에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아직 볕이 뜨겁고 후끈했지만 한여름보다 한결 나아서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아이는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자동차를 유달리 좋아해서 늘 그걸 가지고 놀았는데 이젠 좀 컸다고 매번 마주앉아 놀아주지 않아도 되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손이 덜 갔다. 어쩐지 여유로움까지 감도는 거실에서, 나는 소파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숨이 턱 막혔다. 폐가 팽창하고 기도와 콧구멍은 점처럼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숨이 가슴 안에서만 맴돌고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숨을 전혀 못 쉰 것이 아니니 실제로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성난 황소처럼, 날파리처럼 마구 흥분하여 제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심장이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고 속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찬물을 틀어 얼굴과 가슴에 끼얹었다. 그렇게 자극을 주면 숨이 좀 정리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앞자락이 다 젖도록 물을 끼얹은 다음에는 베란다로 나가 몸을 창밖으로 쑥 뺐다. 그랬더니 좀 나아졌다.


이전에도 이랬던 적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08년 2월에 오사카로 가는 배 안에서였다. 부산에서 출발, 열여덟 시간 뒤에 오사카에 도착하는 배였다. 잠들기 전까지는 꽤 괜찮았다. 친구와 오징어 안주에 맥주 캔을 땄고,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가늠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당시 인기몰이 중이었던 한국 드라마를 보았으며, 밤늦도록 일정을 수정하고 여행 가서 무얼 먹을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행의 설렘을 만끽했다. 다음 날 아침, 몸이 이상했다.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고 마음이 불안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당장 배에서 내리고 싶어, 이런 생각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어졌다. 어쩌다 거울을 봤는데 내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밑이 퀭했다. 간밤에 같이 맥주 캔을 땄던 친구가 말했다. 그럴 수 있어. 스무 살이 넘도록 엄마 아빠랑 같이 살다가 이렇게 집을 떠나보는 게 처음이니까 불안할 수 있어. 나도 막 자취할 땐 그랬어. 괜찮아.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나도 모르게 불안했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얼마 안 되어 불안이 모두 걷혔다. 이후로는 걱정 없이 칠 일간의 여행을 만끽했다.


두 번째는 서울에 직장을 얻어 난생처음 독립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이전보다 심하고 길게 일어났다. 첫 직장은 여러모로 최악이었다. 월급은 열정 페이 수준이었고 사장은 신입사원을 훈련한답시고 늘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날 밤에 다 할 수 없는 분량이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펜을 쥐고 끙끙거려야 했는데 그렇게 해간 숙제도 사장의 마음에 차지 않아 나 때는, 으로 시작되는 연설을 종종 들어야 했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면서 지금은 빼려고 노력해야 겨우겨우 빠지는 살이 한순간에 오 킬로그램 넘게 빠져버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 지 수 개월이 되던 어느 날, 별안간 무서울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더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식도가 안쪽으로 부풀어오르는 느낌에 꼭 질식할 것만 같았다. 특히 건물이나 지하철 안에 있을 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가지 않으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뛰쳐나간다고 해서 숨이 단번에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발견한 방법이 일단 몸에 찬물을 끼얹어 자극을 주는 것이었는데 이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수시로 숨이 가빠왔고, 언젠가는 밖으로 나갈 기운도 없어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쓰러지듯 주저앉아 역무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길까 봐 기차나 버스처럼 길게 이동하는 교통수단을 탈 수 없어 본가에 내려갈 수 없을 정도였다. 일상생활의 유지가 어려웠다. 몸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아마 회사 때문인 듯했다. 회사를 그만두었다. 점차 증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두려웠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내 몸의 통제권을 잃고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 폐와 심장을 부여잡고(부여잡을 수 없지만) 헉헉대는 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웠다. 회사를 관둔 뒤로는 대개 괜찮았지만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조금도 안심할 수 없었다. 또 그러면 어떡하지. 또 누군가 나만 세상에서 뚝 떼어내어 작은 방에 가둬놓고 사방의 벽을 좁히려 들면 어떡하지. 또 목구멍에 천 무더기를 쑤셔넣은 것처럼 숨 쉬기가 어려우면, 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것처럼 가슴이 벌떡이면, 식은땀이 흐르고 손발이 벌벌 떨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계속 걱정하다 보면 또다시 숨이 가빠오기도 하였다.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나를 채찍질하여 불안으로 몰아 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불안의 구덩이에 자꾸만 뛰어들었다. 멀리 구덩이처럼 보이는 게 있으면 당장에 달려가 몸을 던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계속해서 다짐했지만 저 멀리 낯선 것이 보이면 분명 구덩이일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꼭 가까이 가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렸다. 때론 무릎까지 빠질 만한 조그만 구덩이를 이리저리 넓혀 몸이 폭 들어가게 만든 것도 나였다.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꾸만 그랬다. 결국 나를 구한 건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니 기억이 희미해졌고 두려움도 말라갔다. 그렇게 불안에서부터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를 가장 오해했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화나거나 짜증 나는 일이 있어도 곧 잊히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좋은 일처럼 보였다. 남들은 여행을 가고, 노래를 크게 듣거나 부르고, 물건을 때려부숴가며 스트레스를 푼다는데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어느샌가 마음이 평온해져 있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착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스트레스가 발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호불호를 정확히 가르는 일, 글로 나를 표현하는 일도 나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나에 대해 에이포 세네 장쯤은 줄줄 쓸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을 지닌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 차곡차곡 쌓였던 스트레스가 입 밖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와 내 몸을 때릴 때에도 멍하니 서서 그냥 나의 살을 말리고 마음이 불안하도록 놔두었다. 고작 찬물로 샤워하고 밖으로 도망치기만 했다. 병원에 가볼 생각도 못 하고서 그냥 맨몸으로 버텼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더니 또 한 번 숨이 턱 막혀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또다시 시간이 나를 구할 것이라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무력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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