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이람 Nov 14. 2022

이번은 다르다(2)

정신과에 가기로 결심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주로 무얼 했냐면, 웹툰과 웹소설, 텔레비전을 봤다. 그저 재밌는 것들을 보고서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내 상황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이라도 불안해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커튼을 치거나 문을 꼭 닫은 방 안에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원래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문도 꼭 닫고 잤었는데 과호흡이 온 뒤부터는 그랬다간 숨이 콱 막히는 듯했고 불안으로 가슴도 두근거렸다. 잠자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자더라도 깊게 잠들지 못해 새벽에 여러 번 깼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서도 몸이 피로했고 정신이 멍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꼭 밤에 자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잘 수 있다면 낮에라도 자라고 했다. 아이를 어린이집 차량에 태워 보내고선 집으로 돌아와 자보려 했다. 잘 수 없었다. 집이 너무 고요했다. 보지도 않는 동영상이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서 쪽잠을 잤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자둬야 아이가 하원했을 때 밥을 차리거나 놀아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무기력한 와중에 희미한 죄의식 같은 게 느껴졌다, 시간을 너무 낭비한다는. 온종일 하는 일이라곤 핸드폰을 뒤적거리거나 잠을 자는 것밖에 없었다. 제때에 먹지 않고 제때에 자지 않는 삶이 한 달 넘게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는 두통까지 합세하여 안 그래도 힘든 몸뚱아리를 더욱더 지치게 만들었는데 나는 이때 두통약을 잘 챙겨 먹지도 않았었다. 혹여 또 호흡이 불안정해질까 봐 약국에서 산 안정제만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별안간 불안감이 엄습하면 얼른 그 약을 삼키고서 플라시보 효과라도 좋으니 무엇이든 얼른 발현되길 바랐지, 두통약을 살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양쪽 관자놀이에 온종일 송곳을 밀어 넣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는데도 그냥 꾸역꾸역 참았다. 안정제가 더 중요했고, 두통약과 안정제는 몸속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가 지겹고 괴로웠다.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낸 건 언니였다. 남편도 옆에서 무얼 해보라거나 어떻게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으나 평일에는 회사에 나가고 퇴근도 여덟 시가 넘어서 하므로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권유 같은 걸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런 건 그냥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건넨 고마운 말뿐이어서 나도 누운 채로 그 말을 고맙게 들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언니는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보통의 직장인과는 스케줄이 달랐다. 언니는 수요일마다 만나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집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함께 걷고 밥을 먹자고. 혼자 나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으면 먹지 않았을 테지만 함께 밥을 먹자고 하니 그러고 싶었다. 집에 틀어박혀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았고, 말이 통하는 성인과 만나 불안감을 잊고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수요일마다 언니가 내가 사는 지역까지 와주었다. 지하철 역으로만 따지자면 나는 홍대입구역 근처에 살고 언니는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 살아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라지만 매번 내가 사는 곳까지 오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우리는 코로나 때문에 들르지 못하던 홍대의 우동 가게에 가서 밥을 먹고 임신 전에 종종 들렀던 합정의 카페에서 커피나 디저트를 먹었다. 미세먼지가 좋든 나쁘든 한참을 걷기도 했다. 그렇게 세 시간쯤을 보내고 언니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서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돌아갔다.


점차 몸 상태가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외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 이전과는 달리 삶에 활기가 생겼고 불안도 조금씩 걷혔다. 게다가 과호흡 증상은 주로 낮에 일어났는데 낮이라 할지라도 스케줄만 맞으면 당장 달려와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증상이 완화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쉽게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즈음의 나는 툭 치면 바로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늘 그래왔듯, 굳이 불안 요소를 찾아내 쉽게 흥분했다. 어느 날에는 하원한 아이와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이 불안해지더니 곧 과호흡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생각에 사로잡히고 나니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자리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바로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는 이를 닦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나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 가겠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곧 가겠다는 언니의 말을 듣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니 수분 뒤에는 불안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실제로 언니가 도착했을 때에는 웃으며 반길 수 있었다. 또 어느 날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불안감에 휩싸였다. 원래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므로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었다. 지금은 뭐 기억 안 나면 어때, 어쩔 수 없지, 하며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인데 그때는 당황하여 얼굴이 시뻘게지고 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마음이 답답해졌고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그런 몸 상태가 인지되니 더더욱 불안해졌다. 이 사람은 원래도 친한 사람이 아니었고, 마스크를 쓰고서 만난 사이이니 더더욱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익숙한 사람을 떠올려보면 괜찮을 것이다 싶어 고르던 중에, 남편이나 아이는 매일 보는 데다 사진도 넘쳐나니 언니의 얼굴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자주 만나 익숙하지만 굳이 사진을 찍는 사이는 아니어서 언니 얼굴에 대한 힌트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듯했다. 마음이 더더욱 불안해졌다. 지금 언니 얼굴이 떠오르지 않으니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 좋겠다고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 뒤에 언니가 사진을 보내왔다. 안심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때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사진을 보내달라는 메시지를 받고서 언니는 얼른 세수를 했단다. 도의적으로 세수쯤은 하고서 찍어야 할 것 같았다고. 나는 세수를 하든 하지 않든 당장에 사진을 보내주어 너무나 고마운 마음뿐이었는데 언니의 말을 들으니 픽 웃음이 나왔다. 그때의 일이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실은 별일이 맞았는데도.


그때 나는 책을 읽지 못했다. 언어 능력과 인지 능력이 떨어져서 긴 줄글을 읽어낼 자신이 없었고 내가 글을 쓰더라도 그게 문법에 맞게 쓴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어려웠다. 어느 날에는 언니와 이야기하던 중 비슷한 두 단어가 화제에 올랐는데 그걸 구분하기가 어려워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거친 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아이 또한 갈수록 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가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가 이상하단 걸 느끼고서 칭얼거렸다. 아이 앞에서는 티를 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좀 더 지쳤던 것도 같다.


병원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가서 뭐가 문제인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약을 처방받고 싶었다.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게 몸에도 마음에도 좋을 것 같았다. 당장 병원을 예약하자 싶어 인터넷에 들어가 평이 좋은 병원을 검색해보니 그런 병원들은 죄 먼 데다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다. 어떤 데는 토요일의 특정 시간대에 그다음 주 예약을 받는데 맛집 예약처럼 선착순에 들어야만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언니는 그냥 가까운 병원으로 빨리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지도 어플을 켜고서 정신과를 거리순으로 검색했다. 1킬로미터 안쪽에만 정신과가 아홉 곳이 있었다. 그중 한 곳에 전화를 걸어 예약했다. 당장 며칠 뒤로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 번째 고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