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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람 Nov 18. 2022

나의 정신과 탐방기

생각보다 똑똑한 나

예약날이 되었다. 10월 말, 정말로 좋은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볕도, 바람도 걷기에 딱 좋았다. 몇몇은 날씨를 만끽하느라 커피를 들고서 느리게 산책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사이를 종종거리며 바쁘게 걸었다. 예약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지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졌다. 긴장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다녀오면 몸 상태가 빠르게 좋아지리란 기대가 있었지만 혹 약을 먹고서 몸의 통제권을 잃을까 봐 걱정도 되었다. 같은 이유로 더 이상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정신과 약을 먹으면 취한 것과 비슷하게 몸이 늘어지고 몽롱해지며 둔해진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는 정말로 그렇게 될까 봐 두려움을 느꼈다. 종종 사 먹곤 했던 약국의 진정제와는 효과가 확연히 다를 것이었다.


예약한 정신과는 대로변, 치과나 내과 피부과 등이 입주한 건물의 한구석에 있었다. 너무 빠르게 걸어 숨이 찼으므로 문을 열기 전에 호흡부터 가다듬었다. 문을 열었다. 동글동글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노란 벨벳 소파, 잎을 늘어뜨린 화분, 깔끔한 테이블, 그런 것이 보였다. 접수하자 진료 전에 설문지부터 작성해야 한다며 여러 장의 종이를 주었다. 사소한 일에도 자주 좌절한다, 걱정을 멈추기 힘들다, 죽고 싶을 때가 있다, 미칠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등등의 문제에 매우 그러한지 가끔 그러한지 그렇지 않은지 정말로 그렇지 않은지 체크하는 식이었다. 결벽증이나 우울증, 여타의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말 다양한 질문에 답변해야 했는데 답을 체크하다 보니 웬걸, 내가 병원에 오기에는 증세가 너무 가벼웠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렇지 않다에 계속해서 체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러다가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알람을 설정해놓고서 정말로 잘 설정되어 있는지 여서일곱 번씩 확인하긴 했지만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집착은 하지 않았다. 되레 어지럽히는 편이었다. 설문지의 문제를 확인하고 답변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증세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게 조금 웃겼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깃털 같다니.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진료실로 들어가라 했다. 아이와 다니는 소아과에는 진료실 문이 없었는데 여기에는 커다란 철문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생각보다 무거워 문을 제대로 닫지 못했더니 의사가 다시 닫고 오라 했다. 일어나서 힘주어 문을 닫았다.


의사와 유별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왜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증상이 있는지 묻기에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그러곤 생각했다. 와, 나 대답을 엄청 잘하는데. 더듬지도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정확하게 잘 대답하는데. 마치 전문가로서 또 다른 전문가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요즘따라 말도 잘 못 하고 이해도 못한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적절히 잘 답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한 건지는 모르겠다. 설문지를 보고서 어쩌면 나에게 일어났던 일이 실은 별것 아니라는 걸 예감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고, 내 상황에 대해 많이 생각해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대답을 잘했고 그게 웃겼다.


의사는 자나팜이란 약을 0.125밀리그램으로 처방해줬다. 약국에서 사 먹는 안정제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굳이 매번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지금의 상태는 마음가짐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굳이 진단하자면 우울증 증상이 있지만 우울증이라고는 할 수 없고, 여기서 좀 더 발전하면 공황장애가 될 정도라고. 그러니 자나팜을 비상약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누군가는 약을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니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고 또 필요하다면 한 알씩 먹으면서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일단은 일곱 번 먹을 분량을 지어줄 텐데 더 필요하면 와서 받아 가면 된다고.


정신과에 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척 힘들  있다. 그동안의 정신과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어떤 이는  병원에 가는 일이 무척 꺼려질 것이다.   전에 과호흡이 왔을 때엔 병원에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후에 돌이켜보고는 도대체  그랬던 걸까 후회한 적이 있다. 병원에 갔더라면 그렇게 끙끙 앓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적어도 그때보단 빠르게 호전되었을 텐데. 그래서 이번에는 병원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자마자 거리낌 없이 다녀올  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빨리 바꿔버리고 싶었다. 언제  그런 상황이 닥칠까 무서워하며 꾸역꾸역 버티고 싶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병원에 가길 권하고 싶다. 가면 생각보다 증상이 가볍다거나 혹은  반대의 말을 들을  있는데 무엇이든 잘된 일이다. 가볍다면 그러한 사실을 의사에게 확인받았으니 마음이 가벼워져 좋다. 반대라면 의사가 당장에 약을 내어줄 테니 다행이다. 그때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약을  먹으면 된다. 통증 생기면 진통제를 먹는 것처럼 필요한 약을 먹고서  상태를 낫게 만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놔두면 대개 상황은  좋아진다. 의사는 만나보는 것이 좋다.


약은 접수처에서 바로 내주었다. 약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쩐지 이 모든 게 코미디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생각보다 강하고 똑똑했다. 우울증인 건가 싶었는데 아니란다. 산후우울증을 겪기에도 너무 늦었단다. 하긴, 아이가 벌써 네 살이었으니. 게다가 아직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상태란다. 그럼 그동안의 괴로웠던 시간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았고 비로소 맑은 가을날을 즐길 수 있었다. 부러 골목을 돌아돌아 집으로 갔다. 볕이 따사로웠고, 감나무에는 감이 잔뜩 매달린 데다 빛을 받아 진초록 잎이 반짝거렸다. 화단에는 이름 모를 주황색 꽃이 잔뜩 피었고 젖소 고양이가 느른하게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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