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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애 Sep 29. 2022

'허물 벗은 바람' 시 필사

지리산 산행기


허물 벗은 바람


지리산 밑둥에서 올라온 바람

노고단 고개 돌아 시암재 쉼터에서

땀내 풍기며 절어온 세상 욕심을

뿌리 깊숙이 감추었다가

뱀마냥 허물 벗어 놓는다


산자락에서 익어온 독경소리 휘어져 감겨온다

등선들의 자애로운 몸짓 속에 흐르는

지리산의 온정이

바람이기에 바람다워야 하고 

바람다워야 하기에 바람이어서는 안 되는

무거운 상처를 다독여 준다


세상은 산보다 높고 험하지만

잉태하지 못한 별이 있기에 

바람은 부화의 꿈을 안고

세상 속으로 떠나며 영원히 머문다


                                                           <허물 벗은 바람> 필사


블랙야크 100대 명산을 완등 후 어게인 산행을 하는 남편 따라 전국에 있는 많은 산을 다녔다. 어느 산이든 가 보면 다 좋다. 

낙엽이 쌓인 흙길은 비단길이다.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지나면 끝없는 계단이 이어진다. 돌계단, 철계단 나무계단...뭐가 나올지 모른다.



산새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거나 <산자락에서 익어온 독경소리 휘어져 감겨> 오는 걸 느낄 겨를이 없이 밧줄을 잡고 바위를 오르며

 숨을 헐떡거리다가도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한 줄기 바람이 막힌 숨통을 뚫어주듯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코를 벌룸거리며 "아, 좋다!" 하면서도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다. 

                                                                    노고단


노고단이라는 지명은 할미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할미’는 도교(道敎)의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 또는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일컫는다. 신라 시대에 화랑들의 심신 수련장으로 이용되었고, 통일 신라 시대까지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 기슭에 ‘할미’에게 산제를 드렸던 할미당이 있었는데, 고려 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져 지명이 한자어인 노고단으로 된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노고단(老姑壇))]




<허물 벗은 바람> 시에 나오는 시암재 쉼터는 안 가봤고 지리산 탐방지원센터 -막내시누 부부와 갔을 때는 날씨가 화창하였다.

그런데 시인은 나처럼 빡세게 천왕봉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도, 시암재 휴게소에 앉아 <지리산 밑둥에서 올라온 바람>에 땀을 식히면서 그 바람이 <땀내 풍기며 절어온 세상 욕심을 뱀마냥 허물 벗어 놓는다>고 한다. 시인의 경지에 발뒤꿈치라도 따라가려면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까.


바람이 부려놓은 <땀내 풍기며 절어온 세상 욕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정상에 오른다. 한 고개 넘고 또 한 고개 넘었는데도 정상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얼마 안 남았어. 다 와 가. 조금만 가면 돼."라는 남편의 말에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산에 오를 땐 매번 힘 들어도 정상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파도처럼 너울대듯 보이는 산들 


그리고 산허리에 걸쳐 있는 구름도 운치 있다. 수평선도 보이지 않고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기도 한다. 

뭐라 형언할 수 없이 뭉클해진다. 

'나이가 세 살만 넘으면 만만한 놈이 없고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몬당한 산이 없다'는 남편의 말이 실감난다. 어느 산이고 매번 힘은 들어도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그 맛에 산에 오르게 된다.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정상석 인증하느라 사진 몇 장 찍고 서둘러 바로 내려오다 보니 갔다 온 산 이름이며 지역이 가물가물하기도 한다. 가기 전에 남편은 갈 산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상세히 검색을 하고 가는데 나는 어느 지역의 무슨 산에 가기로 한 걸 듣고도 까먹고 건덕굴로 따라나선다.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자욱하여 비가 내리지 않을까, 비옷이라도 챙겼어야 했나 했는데 남편이 비가 안 온다며 오더라도 맞으면 된단다. 그래. 여름비는 맞아도 그만이다 싶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길은 촉촉하고 나무는 물기를 머금고 있다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뭇가지를 흔들어대자 뮬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물기에 젖은 몸이 축축하였지만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식혀 준다. 햇볕도 나지 않고 차라리 등산하기엔 최적의 날씨였다. 조망이 좋았으면 참 좋았을 것이지만 안개 낀 상태로도 좋다. 


지리산은 습도가 높고 흐린 날들이 많은지 나무에 이끼가 많았다. 자잘한 버섯이 나무에 기생하는 것을 보면서 참나무에 표고버섯 종균을 심어 재배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산에 오르다 보면 다른 산에서 봤던 꽃들도 있지만 그 산의 특색 있는 나무와 꽃들이 있다. 노란 꽃이 참 예쁘게  피었는데 이름을 모르겠다.

"너, 누구니?"하고 들여다보다가 네이년(네이버)한테 물어보기도 한다. 내 핸드폰은 데이터가 약해 감질맛나게 기다리게 해놓고 딴청을 하고 번번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새순이 돋아났을 때 저게 원추리 아닐까, 했었는데 산에 지천에 있는 원추리를 보면서도 몰라봤다가 원추리꽃도 보고 섬말라리도 알게 되었다.

                                                               니 섬말라리지?


이제 동자꽃,  범꼬리도 이름을 알았고 조금 여유 있게 걸으며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앞서 가는 남편의 뒤를 바삐 따라가느라 무슨 꽃인지, 

무슨 버섯인지 쪼그리고 앉아 살펴볼 짬이 없어 아쉽다.


천왕봉은 더 빡세다. 깔끄막도 심하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조망을 볼 수 있다는데 천왕봉에 가까이 올라갈 무렵 운무가 자욱하게 밀려와 내심 걱정했다. 운무 때문에 조망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정상에 이르자 운무가 서서히 걷히고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산 아래가 다 보였다. 장관이었다.


<세상은 산보다 높고 험하지만

잉태하지 못한 별이 있기에 

바람은 부화의 꿈을 안고

세상 속으로 떠나며 영원히 머문다>


에라! 모르겠다. 

산을 얼마나 오르고 또 올라가야 깨우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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