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이 엉망이었다. 몇 개 없는 2층침대의 이불과 베개는 모두 바닥과 벽에 나뒹굴고 있었고, 방안 가구란 가구의 모든 문이 다 열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몇 개의 배낭들...
그중에는 내 배낭도 있었다.
이제 내가 가진 거라곤 옷가지 따위가 들어있는 커다란 배낭 이거 하나뿐인데.(심지어 이젠 이게 제일 비싼 물건이다.)
그 배낭이 칼에 찢겨 속을 드러내고 널브러져 있었다.
세계일주를 떠나겠다고 짐을 쌀 때 준비했던 것들 중에 철조망처럼 배낭을 감싸는 와이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열심히 그 와이어를 채우고 여행을 했었다.
그걸 채우고 있어서 배낭을 열 수 없어 칼로 찢었다면 그래도 납득이라도 했을 것이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딱히 귀중품이 들어있는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버렸었단 말이다!(무겁기도 했고)
배낭은 그냥 손으로 열 수 있었고, 심지어 열려 있었는데!
그걸 칼로 찢어 배때지를 갈라놓은 것이다!(부들부들)
어찌 되었건 나와 일본인 룸메는 각자 도둑맞은 물건을 확인했다.
그렇게 배때지를 갈라 고작 훔쳐간 것이 '혹시 모를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을 때 줄 한국적인 선물'이라 명칭 한('4. 이게 나를 살릴 거라는 걸 이 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참조) 손톱깎이(손잡이에 민속화가 그려져 있던 걸로 기억한다.) 뿐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나를 분노케 했다.(부들부들2)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려나.
압권이었던 건, 함께 있던 일본인 친구였다.
얘는 최근에 강도를 만나 너덜너덜해진 나와 달리 아직도 싱싱한(?) 여행자였기에 가진 것도 많았다.
한참 동안 가방을 보더니 노트북을 잃어버렸단다. 그리고 외장하드를 4개 잃어버렸단다.
이 룸메에게는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노트북을 도둑맞았다는 안타까운 현실보다 그동안 외장하드를 4개나 들고 다녔단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그렇게나 필요하나?)
그래도 예의상 건넨 괜찮냐는 말에 돌아오는 그의 말.
"응 괜찮아. 혹시 몰라서 외장하드 7개 챙겨 왔었거든. 다행히 아직 3개 남아있어."
...?
'하하하... 내가 졌다; 네가 짱이야.'
(여러분, 혹시 여행을 하려거든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외장하드는 꼭 7개 정도 챙겨 다니세요.ㅎ)
어찌 되었건 숙소에서 경찰에 신고했기에 현장엔 경찰들이 있었고, 피해자들(이라 쓰고 우리라 읽는다.)은 늦게나마 현장에 도착해서 확인을 했다.
그래서 피해자들(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그냥 '우리들은'이라 읽어도 된다.)은 그대로 그들이 타고 온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그들과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가며 사건을 접수했다.
이미 중남미란 곳에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이들이 범인을 잡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열심히 범인을 찾으려는 노력이나 하려나?
형식적인 절차가 진행되었고, 그들이 준 종이에 이름도 쓰고, 이것저것 썼다.
우리랑 함께 왔던 경찰들이 유심히 우리가 쓰는 것을 보더니 묻는다.
"Coreano?(한국인?)"
"Si(응)"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두 번이나 가진 물건을 도난&훼손당했단 스트레스에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기에, 그냥 빨리 숙소에 돌아가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