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요동은 한민족 방어 체계의 핵심이다.
<태백일사><고구리국본기>를 보면 <조대기>를 인용하여 요서10성을 말하고 있다.
참고로 <조대기>는 대진국을 세운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이 지은 관찬 사서로서 <조선 왕조 수서령>의 수서 목록에 나와있고,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의 조선 왕조 때 지어진 사서에서 일부 내용이 전제되고 있어, 조선 왕조 때까지 실존하던 사서이다.
《태백일사》〈고구리국본기〉
『《조대기》에 이르기를, 태조 융무 3년, (CE 55) 요서에 10성을 쌓고 한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 10성은 이러하다.
1. 안시(安市)성이니 개평부의 동북쪽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2.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3. 건안(建安)은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4. 건흥(建興)은 난하의 서쪽에,
5. 요동(遼東)은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6. 풍성(豊城)은 안시성의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7. 한성(韓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8. 옥전보(玉田堡)는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韓城)에서 서남쪽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9.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곳에 있고,
10. 요택(遼澤)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
더하여 융무 5년 봄 정월에 11. 백암성과 12. 용도성을 쌓았다.』
이 성들의 위치를 파악하면 아래의 지도 1-1과 같다.
===지도 1-1 : 요서10성
(① 우적도는 송나라 1136년에 만들어진 지도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이 우적도에 '요(遼)'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고대 요동은 이 '요'의 동쪽을 의미한다.
② 위 지도의 요서10성 위치의 출처는 《한국 북방 국경의 흐름 - 복기대/허우범/남주성/임찬경/길이숙/신민식/남의현/최규홍/정택선》〈모본왕의 《삼국사기》 요서 정벌 기사를 중심으로 본 고구려 초기의 정복 활동 - 길이숙〉)
중국 민족은 <우적도>에 나오는 '요(遼)'를 기준으로 요동과 요서를 구분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 의견에 따라 <고대 요동>을 그려본 것이 위의 지도 1-1이다.
나름 합리적인 <고대 요동>이 그려지는 것 같다.
하지만, 위 지도 1-1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우적도>의 '요(遼)'는 지도 1-2에서 보는 것처럼 태행산맥 서쪽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고대 요동>에 태행산맥이 들어가 버리는 비합리적인 지도가 탄생한다.
또 같은 지역을 중국은 '요동'으로 부르고 고구리는 '요서(10성)'으로 부른다는 문제점도 있다.
고구리 입장에서 왜 '요서'란 말인가?
요동10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 요서10성인데, '요동성'의 이름도 보인다.
나아가서 요택성은 수/당과의 전쟁 기록에 보이는 요택이 있는 곳에 조성된 성으로 여겨진다.
안시성이 요서10성의 핵심 시설로 여겨지는데, 수/당이 굳이 요서10성의 맨 밑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갈 이유가 있을까?
더군다나 죽음의 200리 뻘밭인 요택을 통과하면서 말이다.
위의 지도 1-1로 보면 안시성으로 바로 달려가면 된다.
요서10성 좌측이 온통 평원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조만간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위의 요서10성을 찬찬히 살펴보자.
이 요서10성에는 수/당과의 전쟁 기록에 나오는 요동성/안시성과 요택이 있는 곳에 조성된 성으로 추정되는 요택성까지 등장한다.
수/당과의 대전쟁은 여기서 치뤄진 것이다.
이것은 고구리의 중심지가 이곳에 있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일명 <장수왕 평양>)이 바로 이곳이라는 설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고구리의 강역은 만주와 요서와 한반도를 망라한다.
그런데 굳이 강역의 맨 서쪽인 <고대 요동>에 수도를 건설할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그곳은 중국 민족과 치열한 전쟁이 거듭되는 곳이다.
이런 위험한 지역에 수도를 건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도도 아닌 이 지역 <고대 요동>을 수/당이 수백 만 대군과 나라의 모든 국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 요동>을 먼저 치지 않으면 고구리의 수도인 <장수왕 평양>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고대 요동>에 남겨진 수십만 고구리 병사들을 뒤로 한 채 <현 요하> 너머 <현 요양>에 있다는 <장수왕 평양>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전쟁의 성패를 가르는 것이 보급이다.
<고대 요동>에 남겨진 고구리의 수십 만 병사들이 보급로를 끊어버린다면 수/당의 군사들은 후퇴할 곳도 없이 그대로 전멸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양제의 백 만 대군과 당태종의 수십 만 정예군은 <고대 요동>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를 수 밖에 없었고, 고구리의 수도인 <장수왕 평양>은 실제로는 먼 발치에서구경도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지도 1-3 : 고대 요동과 요하 유역
(좌측 <고대 요동>에는 요서10성을 위시한 수많은 성과 진과 영이 전하여지고 있다. →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김호림 지음》, 《대륙에서 해를 쫓은 박달족 이야기-김호림 지음》
우측 <요하 유역>에는 답사된 것만 해도 158개의 산성이 있고, 총 204개가 있다고 전한다. → 《산성으로 보는 5000년 한국사-이덕일/김병기 지음》,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원종선 지음》, 《고구려의 핵심 산성을 가다-원종선 지음》
이런 상황을 기록한 것이 고당 전쟁 때 요서10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마지막안시성을 앞두고 벌어진 아래의 일이다.
당태종이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했다고 들었다"라고 말하며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기사이다.
이 기사는 마치 전장이 <현 요하 유역>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고대 요동>에서 벌어진 일임은 안시성의 위치로 인하여 분명하다 할 것이다.
위 기사의 키워드는 안시성과 보급로인 것이다.
이제 좀 전에 미뤄두었던 <고대 요동> 지도를 합리적으로 복구해 보자.
<고대 요동>의 원주인은 한민족이다.
중국 민족의 연나라(춘추전국시대)가 장수 진개를 보내 단군조선을 천리 밖으로 밀어낸 땅이 <고대 요동>인 것이다.
그리고 연5군을 설치했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 그것이다.
<고대 요동>이 곧, 연5군이라는 것은 필자의 설이고 다른 설도 많지만, 일단 필자의 설을 따라와 보자.
뒤에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여기서 요서/요동이 등장하는데, 이 연5군의 군명은 한민족이 부르던 지역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 같다.
따라서 연5군의 요서/요동의 기준은 한민족이 사용하던 '요'가 기준인 것이다.
이 기준은 수많은 사서에서 지목하고 있듯이 '요수'일 것이다.
갈석산은 5군데로 후보지가 나뉘어 지는데, <태강지리지>에 나오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는 구절의 갈석산은 <현 백석산~현 낭아산>으로 하북성 보정시에 있다.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에는 <수성진>이라는 명칭이 아직도 건재하여 이곳이 낙랑군 수성현임을 알려주고 있다.
<갈석산>이 곧, <현 백석산>이라는 것도 필자의 설이고 다른 설도 많지만, 일단 필자의 설을 따라와 보자.
뒤에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백석산의 최고봉은 2000m가 넘으므로 진시황이 올라 봉선 의식을 거행하기는 너무 높다.
하지만 태행산맥 기준으로 서쪽인 백석산에 이어지는 동쪽의 낭아산은 1000m 정도로 충분히 봉선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
이 낭아산이 바로 사서에 9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그 갈석산인 것이다.
<현 낭아산>이 1000m이고, <현 백석산>이 2000m이므로, 낭아산 쪽에서 바라보면 백석산까지 같은 높이로 보이는 <산>이다.
그래서 낭아산과 백석산이 한 묶음으로 <갈석산>으로 고대에 칭해진 것이다.
뒤에 나오지만, <현 낭아산>에 올라 바라봐야지 진시황과 진2세 호해와 한무제와 위무왕(조조)과 진선제(사마의)와 북위문성제와 북제문선제와 수양제와 당태종이 "언젠가 정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바라봤던 한민족의 땅 <고대 요동>이 보인다.
(이 9명의 황제는 <고대 요동>을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갈석산에 올랐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3부에서 서술하겠지만, <고대 요동>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땅이다.
한마디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땅으로 <고대 요동>을 차지하는 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이다.)
즉, <현 백석산>은 태행산맥 서쪽이라 정상에 올라도<고대 요동>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런데 이 갈석산은 사서에 의하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즉, 《상서》〈우공편〉에 "조이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河)"로 되어 있다.
조이는 북쪽에 있으므로 발해를 거쳐서 황하 하류로 진입하는 모퉁이에 갈석산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 백석산 ~ 현 낭아산>은 내륙으로 한참 들어온 곳에 위치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 것인가?
이것은 고대의 갈석산 부근의 해안선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를 알려주는 소중한 지도가 있다.
바로 <기주협우갈석도>이다.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갈석산이 바닷가에 있어서 사서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에 따라 고대의 해안선을 구성해서 앞서 지도의 요서10성을 넣어보면 아래와 같다.
===지도 1-5 : 고대 해안선에 따른 연5군과 요서10성 및 연장성과 요동고새/요동외요
(<고대 요동>인 연5군 지역이 매우 중요하므로 후대에 과거 연5군 지역을 감싸 안듯이 현 만리장성을 연장하여 둘러싸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는 지도 이름에 '협우갈석(夾右碣石)'이 들어 있는 것으로써 알 수 있듯이 《상서》〈우공편〉에 "조이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鳥夷皮服, 夾右碣石, 入于河)"를 설명하기 위한 지도이다.
즉, 오제 시대인 우임금 당시의 해안선을 그린 지도로 추정되는 것이다.
남송 시대인 CE 1177년에 작성되었지만, 그전에 전승되던 지도를 보고 그린 것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이 지도를 통해 갈석산과 연5군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점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위 지도 1-5는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 지형도에 맞춰서 넣되 우임금 당시의 해안선1과 태조왕 당시의 해안선2로 구분하여 <기주협우갈석도>와 비교하여 볼 수 있고, 동시에 태조왕 및 수/당 전쟁 시의 상황도 알 수 있도록 그려본 것이다.
덧붙여, 매우 중요한 강이지만, <기주협우갈석도>에는 아직 탄생하지 않은 강이어서 그려넣지 못한 <패수>를 태조왕대의 새로이 형성된 해안선에 맞게 그려서 추가하였다.
우임금대에서 태조왕대에 이르는 기간에 황하의 엄청난 토사가 쌓여서 새로이 육지가 생기고 여기에 생긴 강이 <패수>이다.
또한, 이 <패수>를 경계로 진/한과 번조선/위만정권이 대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패수>를 경계로 <요동고새>가 설치된 것이다.
<갈석산>은 태행산맥 서쪽의 <현 백석산>과 태행산맥 동쪽의 <현 낭아산>을 함께 이르는 것이다.
<현 백석산>은 2100m이고 <현 낭아산>은 1100m여서 동쪽 바다에서 바라보면 같은 산이나 진배없다.
사서에 <좌갈석>과 <우갈석>을 나눠부르는 경우도 많은데 <현 낭아산>이 좌갈석이고 <현 백석산>이 우갈석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태백일사>에 의한 요서10성 배치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태백일사> 및 <기주협우갈석도>의 정확성이 동시에 입증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갈석산> 논란과 <연5군> 위치 논란과 <수/당 전장> 위치 논란이 이로써 종결될 수 있다.
첨언한다면, <기주협우갈석도>는 옛 지도라서 위상수학을 적용해서 보아야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옛 지도를 현대 지도에만 익숙한 사람이 보면 이상해 보이는데, 그 지도로 옛 사람들은 길을 잘만 찾아다녔었다.
위상수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쉽게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 지형에 대입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위상수학이다.
<기주협우갈석도>에서 많이 구부러진 부분은 강이 태행산맥을 통과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인데, 정확히 현대 지형에 나온다.
그리고 강이 갈라지는 부분도 정확히 현대 지형에 나온다.
바로 저 지형을 그린 것이 <기주협우갈석도>인 것이다.
또 지도의 연5군을 표시해 보면 요동과 요동은 강을 기준으로 나뉘었고, 상곡/어양과 우북평은 태행산맥을 기준으로 나뉘었다.
또 상곡과 어양은 <풍성>을 기준으로 나뉘었다.
<풍성>은 성 하나로 태행산맥 건너편의 상곡/어양 2군을 방어한다.
우북평은 거대한 요택과 <택성>, <요택성>이 방어한다.
태행산맥을 오른쪽으로 돌아 공격해 들어오는 적은 난공불락의 <요동성>이 방어한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안시성>은 산중에 있다고 사서에 나오는데, 정확히 태행산맥 안에 있다.
그 안시성은 번조선/위만 정권의 왕검성이다.
그 안시성을 지키기 위해 요서군에만 다섯 개의 성이 포진해 있다.
한성/옥전보/석성/건안/건흥이 그것이다.
이런 중요한 흐름이 <기주협우갈석도>에서 정확히 묘사되어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를 보면 우북평의 아래에 <요택>을 그려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요수/대요수인 <요수>를 기준으로 동쪽에 요동성이 있어서 이 요수가 요동과 요수를 나누는 기준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요동성이 하나 있음에도 요서10성이라 칭함은 요서10성의 대부분이 요서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요서10성은 <안시성>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안시성은 다른 기회에 언급되겠지만, 번조선의 수도이고 위만정권의 왕검성이다.
이 안시성이 현재의 북경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대로부터 한민족 및 북방 민족의 수도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장성 및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정확히 알 수 있으며 2000m가 넘는 고산준령인 태행산맥 부분부터는 만리장성을 세울 수 없어서 <요동고새> 및 <요동외요>로 단군조선 및 고구리를 방어하고 있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서/북으로 태행산맥을 방어막으로 하고 남으로 요택을 방어막으로 하여 중국 민족의 침공을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당은 <고대 요동>을 공격하려면 꼼짝없이 죽기를 각오하고 요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하여 <태백일사>의 정확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중국 민족의 <요동>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고구리 모본왕의 태원/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 침공에 이은 태조왕의 요서10성 구축으로 고구리는 위 지도상 땅의 지배를 확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한 교체기에 <요동고새>와 <요동외요>란 표현이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중국 민족이 생각하는 <요동>은 고구리의 <요동>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게 만든다.
요동의 한자 풀이는 <먼 동쪽>이다.
그리고 태행산맥은 2000m가 넘는 고산 준령이다.
태행산맥 동쪽 지역은 고대로부터 한민족의 강역이다.
따라서 고대에 넘기 힘든 태행산맥을 넘어 동쪽을 중국 민족은 <소문으로만 듣는 먼 동쪽 땅>인 <요동>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모본왕에게 연5군 지역을 빼앗긴 이후에도 중국 민족의 <요동 땅>의 <아래 부분>을 태행산맥의 동쪽 땅임은 분명하므로 <요동군>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진/한 교체기의 <요동군>과 <요동고새>와 <요동외요>는 이 지역을 칭하는 명칭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위 지도의 <요동고새> 아래 지역이 진/한 교체기의 사서에 나오는 <요동군>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다음 시간에는 <수/당 대전의 진짜 전장과 고구리의 멸망 원인>에 대하여 계속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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