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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그림 Jan 04. 2023

갈석산/연5군/패수/왕검성/한4군/수당전쟁지를 찾았음②

- 수/당 대전의 진짜 전장과 고구리의 멸망 원인

<고대 요동의 중요성과 중국/사대사관/식민사학의 역사 조작>에 대하여 계속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현재 남겨진 유적으로 파악한다면 고구리의 대 중국 방어 체계는 2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는 <고대 요동>을 치열하게 사수하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고대 요동>만 사수한다면 고구리의 본진인 요하 유역은 중국 군대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못한다.


2단계는 <장수왕 평양>을 중심으로 요충지마다 겹겹의 산성을 포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현 요동 반도>와 요하 서쪽과 만주 지역의 산성이 <장수왕 평양>인 <현 요양> 방어에 최적화한 양상으로 포진된 것으로 확인된다.


더군다나 <현 요양>은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거대한 강인 <요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비롯한 여러 사서에는 "고구리에서 고대 압록강(鴨淥江)인 압록수(鴨綠水)를 천참으로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로 <현 압록강(鴨綠江)> 은 <실 사(絲) 변 압록강>이고, 사서에 <물 수(水) 변 압록강> 또는 <실 사(絲) 변이지만, 압록수>는 <현 요하>이다. 

배로 건너야 한다면 배로 건너는 동안에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기에 불리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쌓은 천리장성은 <현 요양>의 북편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 배로 건너야 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북쪽 - 즉, 모용황과 관구검에게 돌파당한, 배가 아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부분 - 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성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하여 건설한다.

특히 고구리 천리장성은 모용황과 관구검 같이 빠르게 침투하고 빠르게 빠져 나가는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건설되었을 것이다.

기습전이 유일한 고구리 1단계, 2단계 방어 체계의 취약점이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천리에 걸쳐서 낮고 길게 장성을 구축했을 것이다.



기습전략이 목표인 군대는 3-4일만 지체시켜도 작전에 엄청난 차질을 빚는다.

이 천리장성이 이 3-4일 지연 역할을 수행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알고 있는 적군이 이러한 기습전략을 수행할 의욕을 상실한다.


바로 전쟁이 억지되는 것이다.



이 낮은 장성을 현 장춘시(졸본)나 현 길림시(국내성) 위쪽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이로써 고구리의 방어 체계는 항공기를 발명해서 공중에서 <장수왕 평양>에 특공대를 내려보내지 않는 한 육공과 수공으로는 침공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방어 체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지도 2-1 고구리 천리장성

===지도 2-1 고구리 천리장성


(연개소문이 쌓은 천리장성은 <현 요양>의 북편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성은 기병을 상대하기 위하여 건설한다.

특히 고구리 천리장성은 모용황과 관구검 같이 빠르게 침투하고 빠르게 빠져 나가는 적을 상대하기 위하여 건설되었을 것이다.


기습전이 유일한 고구리 1단계, 2단계 방어 체계의 취약점이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천리에 걸쳐서 낮고 길게 장성을 구축했을 것이다.


이 낮은 장성을 현 장춘시(졸본)나 현 길림시(국내성) 위쪽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그런데, 중국 측 사서를 보다보면 흥미로운 기사들이 눈에 띈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을 궤멸시킨 <살수대첩>의 <살수>가 <현 요양> 근처인 <현 혼하>로 나오는 것이다.



《한국 북방 국경의 흐름 - 복기대/허우범/남주성/임찬경/길이숙/신민식/남의현/최규홍/정택선》

〈압록수와 평양의 위치 재 비정에 따른 살수 위치 검토 - 신민식〉


이 논문에 <살수>가 <현 혼하>인 이유가 명쾌히 설명되어 있다.



《한국 북방 국경의 흐름 - 복기대/허우범/남주성/임찬경/길이숙/신민식/남의현/최규홍/정택선》〈압록수와 평양의 위치 재 비정에 따른 살수 위치 검토 - 신민식〉



즉, 사서에 의하면 수나라 군사가 살수를 넘자 <장수왕 평양> 30리 밖에 근접했다는 것이다.

1단계 방어 체계인 <고대 요동>은 뒤에 당태종이 패주한 <안시성>이 있는 것으로 봐서 수나라 당시에도 고구리가 차지하고 있었을텐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고대 요동>에 있었던 <요택성>을 근거로 <요택>이 <고대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앞선 포스팅에서 <기주협우갈석도>에 의해 그린 지도에 의해서 이미 파악된 바가 있다.

그런데, 이 요택에서 수많은 수나라 군사들이 전사하여 뒤이어 이 요택을 침공해 온 당태종이 이 요택의 수나라 군사들의 유골들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나라는 <고대 요동>의 요택을 건너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요택에서 수천 리 떨어지고 천참인 요하를 넘어 살수(현 혼하)에서 궤멸될 수 있을까?

그 긴 보급로를 <고대 요동>이 가만히 놔두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요택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면, 살수도 <고대 요동>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따라서 '살수가 <현 혼하>로 분석되는 중국 측 사서'는 <위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고구리의 천참인 요하는 큰 배로만 건널 수 있는 강이다.

그런데 중국 측 사서에는 큰 배로 대군이 도강한 구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이 또한 살수대첩이 <현 혼하>에서 벌어진 대첩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지도 2-2 중국24사에 근거한 장수왕 평양 공격 루트


===지도 2-2 중국24사에 근거한 장수왕 평양 공격 루트


(<고대 요동>을 방치하고 고대에 이 긴 거리를 걸어서 그리고 <중국의 대군>이 요하를 도강하기 위하여 큰 배를 수백 척 만들고 요하를 넘어서 <현 요양>을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위사>인 중국 측 사서는 중국 24사에 들어가는 <수서/구당서/신당서/자치통감>을 비롯하여 명나라에서 편찬한 <대명일통지> 등 유명 사서를 망라한다.

특히 <대명일통지>의 경우에는 혼하 상류를 <살수>로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수나라 장군 신세웅이 전사한 곳"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면 중국이 수/당의 전장을 <요하 유역>으로 조작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 요동>을 <요하 유역>으로 조작하여 한민족 국가가 <고대 요동>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을 막아내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고대 요동>이 수/당과의 전장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고구리는 어째서 멸망한 것일까?

당연히 1단계/2단계의 방어 체계가 뚫렸기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 뚫리는 과정을 묘사한 사서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연개소문 사후 고구리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막리지 자리를 승계한 큰 아들 연남생이 지방의 성을 순시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작은 아들 연남산과 막내 아들 연남건이 정변을 일으켜서 <장수왕 평양>을 장악했다.


연남생이 국내성(현 길림시)으로 달아나서 반격을 모색하는 한편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우효위대장군 계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임명하여 지원한다.


바로 <고대 요동>을 공략한 것이다.


사진 : 연남생 묘지명 앞
사진 : 연남생 묘지명 뒤

===사진 : 연남생 묘지명


(연남생은 죽어서 중국 낙양에 묻혔고 그 지역에서 출토된 묘지명(墓誌銘)이 전해지고 있다.)


이 <고대 요동>이 공략당하는 장면은 사서에서 비어있다.

아마 그 이유는 수/당의 전장을 <요하 유역>으로 조작하려는 것의 연장 선상에 있을 것이다.


아무튼 <고대 요동>은 연남생의 길잡이를 통하여 뚫려 버렸고, <요서10성> 중 항복하지 않은 성도 고립되어 당나라/연남생 연합군의 보급로를 끊어버릴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드디어 고구리 개국 이후 처음으로 <고구리 도성>이 <중국의 대군>의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중국의 대군>이다.


왜냐하면 모용황의 공격이나 위장 관구검의 공격에 의해서 <고구리 도성>이 공격당한 일은 있지만, 이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병력으로 짧은 시일 내에 치고 빠지는 전략에 의해서 <고구리 도성>이 공격당한 것이다.


소수의 병력으로는 <고구리 도성>을 짧게 공략하고 빠질 수는 있지만, 고구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장기간의 <고구리 점령>은 불가능하다.

고구리 점령을 하려면 고구리의 수백 개의 성들을 제압해야 하고 이럴려면 <대군>을 동원해야 한다. 

점령한 각 성에 수 천, 수 만의 병력을 남겨둬서 수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군>과 <보급>이 없다면 <청야 전술>로 대응하는 고구리를 멸망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명림답부의 좌원대첩>으로 역사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형제 간 내분의 와중에 고구리의 남쪽 신라 전선을 맡고 있던 숙부인 연정토(연개소문의 동생)가 고구리 남쪽의 12성, 763호, 3,543명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해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당나라/연남생 연합군은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보급>이 절실했는데, 천운으로 신라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사서에 660년 백제가 무너진 이후 거의 매년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한 666년 이후에나 평양성 공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지만 않았어도 2단계 방어 전략이 준비되어 있었던 고구리가 쉽게 당나라에 멸망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리의 멸망은 1단계/2단계 방어 체계의 문제가 절대 아니며 내분의 문제 때문인 것이다.


지도 2-3 고구리의 멸망


666년 연정토가 투항한 이후 당나라의 <대군>은 당나라를 출발하여 천리장성을 뚫고 <장수왕 평양> 우측에 진을 차렸을 것이다.

여기서 2년 간 신라로부터 보급을 받으며, <장수왕 평양>에 맹공을 가했을 것이다.

사방이 고립된 <장수왕 평양>은 668년 항복하였고, 당나라의 <대군>은 철수하지 않고 <장수왕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후 고구리의 성들을 하나씩 점령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로 남침 야욕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라로부터의 보급>이라는 절대 조건이 사라진 이상 이는 무리한 욕심이었고,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할 때 바친 고구리 남쪽 12성을 기준으로 해서 당나라와 신라의 경계가 그어졌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고대 요동의 중요성과 중국/사대사관/식민사학의 역사 조작>에 대하여 계속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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