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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 Jan 13. 2019

먹는 속도, 자라는 속도


첫 수확을 시작으로 모든 작물들이 일제히 성장속도가 부스터를 단 듯 빠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밭을 가 자란 채소를 수확해 오는 것으론 이 수확물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먹는 양이 많지 않다는 것도 한 몫 했다. 그 비싼 루꼴라, 로메인이 이렇게 짐승같은 속도로 자랄지는 상상도 못했다. 가끔 내 샐러드의 재료가 되어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정도로 심었는데 이젠 삼시세끼 샐러드만 먹어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났다. 


채소가 자랄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하는 솎아내기 작업을 미처 하지도 못했는데 장식용으로 쓰려고 한 이탈리안 파슬리는 감당이 안될만큼 자라나 주변의 로즈마리나 바질의 영역을 삼키기 시작했고 쌀국수를 먹을때나 필요한 고수는 두 포트로 시작해 식당에 납품해도 될 만큼 존재감을 뽐냈다. 


농사는 나의 스케쥴을 따라 진행되지 않았다. 내 생각과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언제쯤 솎아내기를 해야지, 언제쯤 가지치기를 해야지 하는 계획들은 거의 망상에 가까웠고 난 이 모든 일들을 허덕이며 뒤쫓기 바빴다. 


처음엔 그저 내가 다 먹으면 되지 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시작했고 나중에 고수를 뜯어서 밥 먹듯 우걱우걱 씹어 먹어도 그 양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당연한 결론에 다다랐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왜 난 그저 자라기만 된다고 생각했을까? 

이 귀한 것들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의 고민 사이 채소는 억세지고 커져서 그 맛이 원래만 못했다. 때때로 쓴맛도 나고 질겨져 샐러드용으론 커녕 겉절이로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게 바로 농사려나.

이 속도는 언제쯤 제 숫자를 맞춰 갈까.

아니, 나는 언제쯤 나만의 속도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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