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을 읽고
*믹스커피 출판사로부터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태어나 자란 고향에 돌연 나타난 거인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며 100년 동안 만들어졌던 벽 안 세계의 평화가 무너진다. 어머니가 거인에게 잡아 먹히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소년은 복수심을 느끼고 지상에 있는 모든 거인들을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한다. - 진격의 거인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자 승자의 역사이다. 역사학자 윌 듀란트에 따르면 3,500년의 인류 역사 중 전쟁이 없던 시기는 270년에 불과하고, 그 모든 시기는 대부분 승자인 거인에 의해 기록되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잡아먹는 거인의 행위에는 당위성을 찾아볼 수 없다. 배고파서, 나를 공격할까 봐, 눈에 띄어서, 재미로 등등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인간은 크기가 크든 작든 똑같다. 생존을 위해선 못할 게 없다.
참는 데까지 참지만 참지 말아야 할 건 결국 참아내지 않는 걸 인간의 존엄이라 한다. 억압받는 자가 어디서도 권리를 찾을 수 없을 때, 어떤 다른 방법도 소용이 없다면 마지막 수단으로 칼을 들 수밖에 없다.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자신의 삶과 죽음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인간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거인이라 할 수 있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이 책은 작은 힘으로 세상을 뒤집은 진정한 거인들의 이야기다. 거인 나폴레옹에 맞선 스페인 게릴라의 투쟁, 파멸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스파르타쿠스, 세계사 최대 빌런 히틀러에 저항한 평범한 노동자,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짓밟는 종교 앞에 죽음을 선택한 사우디 왕국 공주 등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바쳤고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 거인을 쓰러뜨렸다.
"(악질 친일파와 일본군 사령관) 둘을 암살한다고 독립이 되는 건 아니지만,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 영화 '암살' 속 독립군 안옥윤
이 책에 가슴 뛰고 뭉클한 이야기만 담긴 것은 아니다.
수십, 수백 배 큰 나라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자존심을 꺾지 않는 당당한 태도, 주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기개, 할 말은 하고 사는 용기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그랬다간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고 하나의 역사가 송두리 째 사라질 수 있다. 1939년 핀란드의 예를 보자. 그들은 적(소련)과 전력차가 클 땐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적의 적(독일)에게 접근해 무기를 빌렸다. 적(소련)이 다시 득세할 기미를 보이자 잽싸게 동맹군(독일)을 배신했다. 의리 없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핀란드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영웅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다윗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기에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어쩌면 자유와 평화의 대가는 정정당당함이 아니라 잔인하고 비열한 전략, 전술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예전과 같은 세상에서 예전처럼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원도 있고 꽃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즐거운 목소리도 들립니다. 바로 저편에는 지옥이, 학살이, 모든 인간과 선한 것들이 소멸해 가는데 말입니다. 저편에서 나치 대원들은 도살자이고 고문자이지만 여기서는 사람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아니면 저기? - 폴란드 군인 비톨트 필레츠키
다들 저 벽 너머엔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막상 가보면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모르고,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깔보고,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이다 보니 벽밖 세상의 악마가 탄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 영화 속 사람이 죽는 건 끔찍해도 좀비나 오크의 머리가 날아가는 건 짜릿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나치에겐 유대인이, 일본제국군에겐 조선인이 좀비나 오크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군인에게 북한군이 그랬던 것처럼.
언더독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집에 쳐들어 온 나쁜 좀비나 오크만 무찌르면 되는 게 아니다. 악마인 줄 알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저녁식사를, 가족을, 목숨을 빼앗을 냉혹한 각오를 하는 일이다. 나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 진짜 거인이 된다는 건 달달한 일만은 아님을 이 책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