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ollized(1)
노란 할로겐 조명이 드문드문 걸려있는 무대가 멀찌감치 보인다.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세 쌍의 의자가 서로 마주 보고 놓여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앞자리 의자와 제 무릎 앞 사이 공간에 삼각대를 설치하며 투덜거리는 것을 들었다.
“아… 보정 개 빡세겠네.”
수천 번을 들어 외우다시피 한 익숙한 노래들이 가사 없이 흘러나온다. 주변의 몇몇 여자들은 곡조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챙겨온 것들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비닐로 싸여있는 앨범의 포장을 익숙하게 벗겨내고 가사지를 차르르 펼쳤다. 그러고는 전날 밤을 꼬박 고뇌하고 글씨체까지 신경 써가며 적은 캐릭터 포스트잇을 어느 면에 붙일지 고민했다. 물론 모든 준우는 아름답지만, 어떤 준우가 가장 예쁠까. 나는 보고 또 본 익숙한 사진들 속에서 지금 이 순간 가장 예쁜 준우를 찾고 있다. 웃는 준우와, 더 활짝 웃는 준우, 셔츠를 입은 준우와, 재킷을 입은 준우 중 어디에 더 길이길이 남을 사인을 받을 것인가는 이 순간 나에게 중대한 문제였다.
찰칵, 찰칵, 옆자리 여자가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리고 빈 무대를 연신 찍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예쁜 준우 찾기를 잠시 멈추고 옆자리 여자와 같은 방법으로 삼각대를 설치했다.
“배터리, 100이고… 추가 배터리, 잘 있고… 화질 4K로 맞춰져 있고…”
“처음 오셨어요?”
“앗, 네.”
“캠 좋은 거 빌려오셨네. 풀로 찍으시나요?”
“네. 아무래도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요.”
“중간중간 잘라주시는 게 좋아요. 나중에 편집할 때 용량 커서 안 돌아가요.”
“아하, 감사합니다.”
준우의 팬사인회는 늘 줄세우기였다. 이번 사인회는 응모 기한 내 사운드웨이브 용산점에서 앨범을 많이 구매한 순서대로 1등부터 100등까지 줄을 세워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사운드웨이브에서 앨범을 사면 한터차트에 반영되어 음원 성적에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소속사에서는 지점별로 사인회를 열어 앨범 판매량을 늘리고는 했다. 나는 이번 팬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 구 트위터 현 엑스를 통해 앞서 당첨되어 다녀온 팬들에게 디엠으로 몰래몰래 팬싸컷을 물어보았다. 그들이 이야기했던 구매 앨범 수보다 스무 장을 더 사고 나니 넉넉하게 당첨되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앨범을 사러 갔던 레코드사에서 취급하던 궤짝 같은 앨범 박스가 두 개나 현관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2만 4천 원짜리 앨범이 40장씩 꽉꽉 들어차 있는 궤짝이 두 개나… 였다. 나의 사인회 당첨 소식을 들은 배운 덕후 친구들은 ‘네가 이번 기회를 위해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너와 준우의 역사적인 첫 만남의 순간을 담아야만 한다’며 강남에 있는 카메라 렌트 가게를 추천해 주었다. 정확하게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으므로 당당하게 준우와 마음껏 대화할 수 있는 갠멘의 시간이었다. 카메라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지만, 친구들의 추천을 받은 소니 캠코더를 찾는 나에게 렌트 가게 사장은 이런 손님은 익숙하다는 듯 4K 화질로 녹화가 가능하고 줌인-아웃이 편한 캠코더를 내주면서 삼각대에 설치하는 방법까지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사장은 멀뚱한 표정으로 삼각대의 목 부분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힘으로 세게 하면 부러져요, 부러지면 변상하셔야 합니다, 하며 여러 번 신신당부했다. 나는 팬사인회 현장에서 삼각대와 캠코더를 사장이 알려준 대로 설치하고는 행여 배터리가 닳을까 얼른 전원을 껐다.
“잠시 후, 엘리브 멤버들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사인회는 번호표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무대 위에서 녹취는 금지되며, 편지나 선물 전달은 사인을 받을 때 직접 하시면 됩니다. 선물 중 음식이나 꽃은 받지 않습니다.”
“으… 떨려.”
무대에 올라온 매니저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안내 사항을 읊는 동안 나는 두 손의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했다. 길러놓은 손톱이 손바닥을 적당히 자극했다. 아아, 팬사인회, 그것도 준우의 사인회라니. 수많은 시간을 넘고 넘어, 피 같은 돈을 들이고 들여 드디어 내가 왔다. 시험종료 5분을 남기고 OMR 카드를 바꿨을 때나, 처음 면접을 보러 들어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크고 빠르게 뛰었다. 사인회장을 잔잔하게 메우던 이번 앨범 수록곡 소리가 커지자 장내에 앉은 팬들이 웅성거렸다.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전력 질주를 하고 났을 때나 느꼈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저 다음에는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번에 점수 이렇게 받으셨잖아요.”
“컷이랑 겨우 2점 차이가 나요. 컷에 걸쳤어도 어차피 면접 봤으면 떨어졌겠죠?”
“기출 빠르게 회독하면서 한 번만 더 해보세요. 다 온 것 같아요.”
노량진역 육교 옆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공무원 시험 학원의 상담실에서, 나는 과목별 시험 성적을 적은 쪽지를 들고 마냥 막막한 마음을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토로하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공무원 시험 같은 것에는 뜻이 없거나, 혹은 시험을 준비하다 돈이 필요해서 그 길로 학원 취업을 선택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저 누군가의 영혼 없는 응원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낮의 1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더럽게도 좋았다. 어느새 따뜻해진 날씨는 곧 6월에 있을 지방직 시험을 의미했다. 나는 거실에 TV를 켜 놓은 채로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시간이 가는 것을 세어 보았다. 부쩍 초조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무력했다. 아련한 오르골 소리를 배경으로 앳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요, 사실은 안 괜찮죠."
조금 훌쩍거리는 것도 같았다. 힐끗 화면을 쳐다보니 분홍색 맨투맨에 마라톤 출전할 때나 쓸 것 같은 이름표를 배에 붙인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화면 아래에는 ‘눈물을 훔치는 이준우 연습생’이라는 자막이 붙었다. 최근 유행하고 있다는 아이돌 연습생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은 방금 나와 눈이 마주친 이준우 연습생의 사연이 나오는 중이었다. 다른 연습생들은 프로그램 초반부터 탄탄한 팬층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중인 반면 이준우 연습생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어 탈락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은 무서워요. 같이 준비했는데, 저만 돌아가야 된다면…”
노량진 학원에서 마음껏 말하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이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고 거실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대학 동기들의 취업 소식이 왕왕 들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공무원 시험 하나 붙지 못해 사회생활이라고는 시작도 해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7급을 하겠다, 고시를 보겠다, 하다가 도저히 긴 수험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어 9급이라도 해보자 했었건만 그마저도 며칠 전 시험에서 마킹 실수로 탈락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자꾸만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 뒤로, 뒤로 물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한쪽 양말을 채 벗지도 못한 채로 이준우 연습생의 사연에 자꾸만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