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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촉 Nov 04. 2024

N년째 덕질 중: 화요일에는 빨간 편지봉투를

덕업일치를 이룩한 어느 아이돌 덕후의 로맨틱 코미디

   인생을 살다 보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나기도 한다. 영어로 romantic이 무슨 뜻인지 검색해 보면 ‘낭만적인’이라는 뜻이 있다. ‘낭만주의’에서 말하는 낭만이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라고 한다.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다 눈이 맞아 연애를 하는 것보다는 컵밥을 먹으며 마음에 품었던 이를 파리에서 만나 함께 여행을 하는 쪽이 훨씬 ‘낭만적’이다. 내 인생에도 ‘파리 컵밥’이 있다.


   어릴 때부터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이상하게도 공부하는 것 빼고 다른 게 다 재미있었던 나의 특성이 가장 거대하게 발현된 시기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1~2년간이었다. 그놈의 공부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볼 드라마 다 보고 잘 잠도 다 자가면서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1년 만에 공시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어려웠다. 남들은 할 거 다 하면서도 합격하던데 하필 그때가 공무원의 인기와 경쟁률이 하늘을 찌를 때라서 그랬던 건지, 공부의 절대량이 부족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시험 준비를 시작하고 첫 번째 시험에서 그야말로 광탈을 했다. 이렇게 하다가는 영영 끝없는 공시의 세계에 갇혀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부터 다시 하기로 마음을 다잡고 다음 1년은 최선을 다해 볼 생각으로 드라마도 안 보고 잘 잠도 덜 자면서 준비했다. 당시 모두가 조언해 준 대로 월화수목금토요일까지 주 6일을 공부하고 일요일 낮에는 쉬고 일요일 저녁에는 다음 주 공부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하고 나니 절대량이 드디어 채워진 건지 합격하던 해에는 하늘을 찌르던 경쟁률과 커트라인 점수를 뛰어넘어 그 해 지원한 모든 직렬에 합격했다.


   지금은 지방직 공무원 시험 날짜가 통일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최소 3개 이상의 시험을 볼 수 있었다. 1년 중 4월은 국가직, 6월은 지방직, 서울시 시험 순서로 진행되었다. 4월 국가직 시험을 마치고 가채점을 해보고 커트라인을 훌쩍 넘는 점수를 받고 나서 드디어 어디 한 군데는 갈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에 토요일 오후, TV를 켰더랬다. 왜 하필 그 시간에 그 채널을 켰을까. TV에는 오늘 밤 주인공은 본인이라고 외치는 소년들이 무려 101명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한창 방영 중이었고, 그때 한 소년이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이 나왔다. 경쟁체계 속에서의 합숙생활이 고되었던 것인지 소년은 눈물을 보였고,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에게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라며 위로하고 있었다. 오랜 공시생 생활을 했던 나는 이상하게 그 장면에서 소년의 어머니에게 위로를 받았고, 그 순간 소년과 나를 동일시했다.


    ‘쟤 이름이 뭐지?’

   그게 끝이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프로그램은 상당한 열풍이었고, 학창 시절 한 번도 제대로 된 팬 문화를 접해보지 못했던 내가 허겁지겁 배우게 된 것은 ‘조공’을 통한 응원 문화였다. 소속사를 통해 연습생에게 선물을 보내고, ‘내가 너를 이만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는 방식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소년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던 나는 저 친구를 응원해 줘야겠다고 생각했고 급기야 큰 마음을 먹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 소속사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그런데 당시 소속사 측에서는 홈페이지에 ‘연습생들을 향한 응원은 팬분들의 정성이 담긴 편지만을 받습니다.’라고 공지해 두고 편지 외에 물건을 통한 조공은 일절 받지 않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정성이 담긴 편지? 내가 정성이 뭔지 보여주지.'

    내 인생 최애를 향한 정성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월화수목금토요일까지의 공부를 마치고 나면 그 주에 했던 경연 프로그램을 보고 최애를 모니터링했다. 최애의 직캠영상도 빠짐없이 봤고, 어떤 점이 예쁜지, 어떤 점이 멋졌는지 어떤 걸 잘했는지 꼼꼼히 기억해 두었다가 일요일이 되면 경건한 마음으로 편지에 모조리 적었다. 이 무대에서 이런 점이 너무 좋았고, 너는 목소리가 어떠어떠해서 좋으며, 이런 표정을 지었을 때 너무 멋졌다. 그리고 너는 결국에는 모두가 인정하는 멋진 가수가 될 것이라고, 너는 정말 잘하고 있다고 꾸준히 주문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말들은 최애를 향한 것이기도 했지만, 아마도 당시의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주말 동안 세장에서 다섯 장, 많으면 여섯 장이 되는 편지를 적어 늘 같은 색 편지 봉투에 편지를 담아 월요일이 되면 집 앞에 있는 우편취급국을 통해 등기로 편지를 부쳤다. 그렇게 보낸 편지는 꼬박꼬박 매주 화요일에 최애의 소속사 사무실로 도착했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최애가 편지를 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새로운 공부 스트레스 해소 방법 같은 것이었고, 편지를 쓰면서 응원하는 마음을 종이에 가득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나의 최애는 프로그램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중도 탈락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인생을 응원하고자 계속해서 편지를 보냈다. 최애의 소속사에서 나 같은 팬들을 위해 마련한 최애의 첫 브이로그 방송 이후 편지에는 너의 첫 브이로그가 얼마나 감명 깊었는지, 거기에서 너는 어찌어찌했으며 얼마나 예뻤다는 내용을 적었고, 프로그램 종영 기념 콘서트에 가기 위해서 슈퍼스타 아이돌의 팬이었던 친구들을 모두 티켓팅 용병으로 동원하여 티켓팅을 성공하고 나서는 편지에 ‘티켓팅 성공해서 너를 보러 간다’는 내용을 적었으며, 콘서트를 보고 와서는 네가 콘서트에서 어떠했는지, 콘서트가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네가 만약 데뷔를 하면 너의 첫 콘서트는 얼마나 감동적일지에 대해 적었다. 내 최애에게 나 같은 팬이 있다는 걸 소속사에서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그리고 최종 엔트리에 들지 못해 또다시 끝없는 연습생 생활을 지속할 최애에게 응원을 보내고 힘을 보태주고 싶어서 나는 편지를 한 주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보냈다. 나와 같은 팬들의 염원이 이루어진 것인지 최애는 드디어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애가 데뷔할 때 나는 시험에서 최종합격을 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시간들인가. 내 인생이 ‘덕업일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최애가 데뷔를 하고, 최애의 목소리로 가득 찬 음원이 나왔다. 온통 최애로 가득한 앨범이 나오면서 팬사인회를 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내 인생 첫 아이돌 팬사인회!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다른 아이돌 팬들(위의 티켓팅 용병 친구들)의 소위 ‘팬싸후기’를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최애를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얼마의 돈을 들였을까(엄마 미안 아빠 미안 내 통장 미안), 드디어 최애의 팬사인회에 당첨이 되었다. 최애의 예쁜 앨범 속 가장 예쁜 최애의 사진이 담긴 페이지에 사인을 받으려고 전날부터 준비하고, 최애가 좋아하는 캐릭터 인형을 가장 큰 사이즈로 구매했다.


   강남에서 열렸던 나의 첫 팬사인회에서 나는 100명 중 50번이었다. 49명의 다른 팬들이 앞서서 사인을 받고, 모든 팬들이 각자의 사연을 담아 각자 최애에게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에 대해 예쁜 말들을 쏟아내는 시간들이 지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최애와 대면하여 눈이 마주친 순간은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여타의 시험과 면접 때보다도 훨씬 더 떨렸다. 면접관은 그냥 아저씨지만, 내 최애는 평생 나의 최애이므로. 아마도 내 인생에 그 어떤 시험이 온다 해도 그때보다 떨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실제로 그렇게 떨리는 순간은 지금까지 전무후무하다.) 나는 처음 사인회에 온 팬답게 달달 떨리는 마음과 손을 부여잡고 일단 가지고 온 것을 전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사인받을 앨범보다 최애가 좋아할 큰 캐릭터 인형을 먼저 내밀었다. 그리고 말하는 법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뚝딱거리며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해서… 가져왔어요.”

   “와! 진짜 큰 걸 가지고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최애가 환하게 웃었다. 최애의 환한 웃음에 배송도 되지 않는 특대형 캐릭터 인형을 사서 이고 지고 오는 동안 힘들었던 순간들이 모두 잊혔다. 가까이에서 본 최애는 눈도 크고 이목구비가 생각보다 더 뚜렷해서 정말로 비현실적이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쭈뼛거리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흔해빠진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데뷔 너무너무 축하해요. 노래가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어…”


   최애는 습관적으로 사인해 줄 사람의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사인받을 사람 이름에 성을 뺀 나의 이름 두 글자만을 적어두었다.


   “근데 혹시 OO이면… 혹시 저한테 편지 써주는 OOO누나이신가요?”

   “아…?”


    이건 아마 내가 죽기 전에 스쳐 지나갈 주마등 중의 한 순간이지 않을까. 그랬다. 나의 최애는 무려 내 이름 세 글자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OO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성까지 연결해서 기억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절대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수많은 편지들을 매번 읽고 있었기 때문에 성을 포함한 나의 풀네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앞의 최애의 목소리만 들리는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정말이에요? 매번 빨간색 편지봉투에 편지 써주시는 OOO누나예요? 와 맞구나! 와! 너무 신기해요! 혹시나 제가 데뷔하면 팬사인회에 오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매번 보내주시는 편지 정말 잘 읽고 있어요. 정말 많은 힘이 되고 있어요. 저를 좋아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와, 이런 날이 오네요. 그쵸? OO누나만나는구나!"


   그날, 최애와 나의 팬사인회는 어쩐지 주객전도된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최애는 내가 시험에 합격했는지 물어보았으며, 내 손을 꼭 붙잡고 내가 보내준 편지가 얼마나 자신에게 힘이 되는지에 대해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나는 그런 최애를 보면서 아마도 나는 지금 눈앞의 최애를 평생 응원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최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바르고 마음이 따뜻하고 섬세한 소년이었다. 나는 이렇게 좋은 사람을 내 최애로 삼아서 마음을 다해 응원해 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이후 앨범을 구매해 가며 팬사인회에 여러 번 더 가고, 최애의 콘서트와 행사에도 빠짐없이 갔다. 최애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콘서트의 막이 오를 때 마치 내가 데뷔하는 가수인 것처럼 마음 벅차기도 하고, 외국에서 팬미팅을 한다고 하면 열심히 표를 구해서 따라가기도 하면서 임용 전까지 즐거운 덕질을 했다. 임용 후에는 현실을 살아내느라 임용 전만큼 행사까지 따라다니며 응원하지는 못했지만, 간간이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콘서트 표는 빠짐없이 구해서 응원봉을 들고 갔다. 공무원이 되고 비록 3일 만에 현타가 왔었지만, 바로 퇴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장 최애의 앨범을 사면서 쌓인 카드값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심한 일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내가 아직까지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것은 최애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내 최애는 이제 데뷔 8년 차 가수가 되었고, 나는 그를 9년째 응원하고 있는 팬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코로나19가 할퀴고 간 아이돌 시장은 더욱 혼돈스러운 중에 침체기를 지나고 있어 아이돌 가수로 데뷔를 한다 해도 크게 성공하기가 어렵다. 내 최애는 비록 아직까지 빌보드 차트에는 들지 못했지만, 처음 소속되었던 소속사에서 꾸준히 팬들과 소통하며 잘 지내고 있다. 연습생 때부터 해보고 싶었다던 라디오 DJ도 하면서 10대 소녀들의 마음도 사로잡았고, 요즘은 예쁜 이목구비를 살린 늠름한 배우가 되어 활동 중에 있다.


   최애를 처음 만난 해로부터 몇 년이 지나 오랜만에 팬사인회를 가본 적이 있다. 최애의 미모는 여전했으며, 그동안 아이돌 짬바가 생겨서 제법 프로 아이돌 같은 면모로 팬들을 조련까지 하고 있었다. 성공한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마음이 이런 걸까. 그날도 내 순서가 되어 최애의 눈앞에 앉았다.


   “OO누나! 잘 지내셨어요?”


   내 최애는 나를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맞이했다. 최애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9년 전의 나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끼는 것을, 내 최애는 알까. 너의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소년들이 나왔다 스러져 가는 경연 프로그램에서 고작 나의 한 표로밖에 응원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온 마음을 다해 너를 응원하던 20대의 내가 있다. 사실은 너를 통해서 나를 응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최애는(아마도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나의 20대를 담고 있다.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왔죠. 여전히 노래 잘 듣고 있어요. 요즘은 예전처럼 편지를 자주 써주지 못하는데 기억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요. 누나는 제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제가 연습생일 때부터 응원해 주셨잖아요. 응원해 주신 마음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이 마음 따뜻한 소년을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지막 팬사인회를 다녀온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고, 편지를 쓰지 못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대출도 갚아야 하고, 회사 일에 파묻혀 게으른 팬이 되어버렸지만, 인스타그램 속 수많은 게시물과 릴스를 보다 마주치는 최애의 근황 셀카를 보며 오늘도 생각한다. 최애야, 돈 많이 벌고 늘 행복하렴. 어느 날 네가 나에게 행복이 된 것처럼, 너도 어떤 날이든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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