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무차원의 입자들

제6화 아버지의 경계

by 늘람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린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그 감각은 언제나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미지의 선율처럼 다가왔다가 사라졌다. 유리 너머로 비치는 풍경처럼 선명하지만 만질 수 없는, 마치 아버지의 감정도, 기억도, 의도도 아닌 어떤 '위상'이 린의 눈앞을 흘러가는 듯했다.

저녁 식사 때면 아버지의 손가락이 수저를 쥐는 방식에서도, 책을 넘기는 소리에서도, 그리고 특히 창밖을 응시할 때의 그 깊은 침묵에서도 린은 언제나 그 무언가를 감지했다. 서재 문이 닫힐 때마다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했지만, 결코 질문으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접촉 이후, 린은 더 이상 무관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중심에 서 있었다. 감각의 초점이자, 무차원의 입자가 흘러드는 통로. 이제 그 의문들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필연적 질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아버지는 린의 방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의 손길이 노크하는 소리는 평소와 달리 공기 중에 미세한 파동을 일으켰고, 린은 그 파동이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무차원의 흔들림을 시각화한 도형들을 그리고 있었다. 선이 선을 부르지 않고, 점이 파동을 잡아당기고, 그 위에 의식이 얹히는 구조. 펜이 종이 위를 움직일 때마다 그림 자체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린."

그 한마디로, 린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잠깐, 얘기할까."

그의 음성은 평소처럼 낮고 담백했지만, 이상하게도 공기 안에서 '반사'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진동도 남기지 않고, 직선처럼 곧장 린의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허공의 틈새를 통과하는 빛줄기처럼.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의 조명은 평소보다 어둡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오래된 책장 안쪽에서 한 상자를 꺼냈다. 낡은 나무 상자였다. 오크나무에서만 나는 특유의 따뜻한 광택과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자물쇠가 없었지만, 뚜껑을 여는 아버지의 손길에는 분명한 결의와 동시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미뤄왔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려는 듯한.

"이걸 보여주려고 오랫동안 생각했어."

상자 안에는 오래된 가죽 수첩, 색이 바랜 폴라로이드 사진들, 정교하게 제작된 금속성 구조체 조각들, 그리고 무엇보다 린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한 장의 얇은 필름이었다. 투명한 필름 위에는 물리 수식인지 언어인지 모를 기호들이 촘촘히 찍혀 있었다. 빛을 통과시키면 그 기호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환영을 일으켰다. 그것은 누군가의 설계도이자 은밀한 고백처럼 보였다.

"이건..."

린이 말끝을 흐리자, 아버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20년 전, 나도 너처럼 감각이 깨어난 적이 있었어."

그 말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동안, 린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가 아직도 그곳에 반쯤 발을 담그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식 같았다.

린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두통이었지. 관자놀이가 욱신거리고, 가끔은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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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결'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조용히 스며드는 이야기를 씁니다. 늘 머무르며 흐르는 글로 만나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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