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물리학을 '과학'이라고 부른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과학.
문과와 이과로 나뉜 고등학교 교실 안에서, "나는 수학은 괜찮은데 물리는 좀…"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다. 이공계를 택한 학생들조차 물리학을 앞에 두고는 주춤거리고, 때로는 조용히 뒷걸음친다.
하지만 나는 때때로 그 풍경이 안타깝다. 누군가는 그 '어려움'이 수학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물리학을 '배운 적'은 있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를 진심으로 들어본 적은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고된 과목으로 인식하고 있는 물리학이, 원래는 어디에서 시작된 학문이었을까. 우리가 기호와 공식 속에 가둬버린 이 과학이, 원래는 어떤 물음에서 출발한 것일까.
질문은 나를 물리학의 뿌리로 안내했고, 그 뿌리는 철학이었다.
물리학을 공부하며 과학사 속에서 접하는 이름들, 탈레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 뉴턴, 아인슈타인까지. 그들은 오늘날 과학자로 불리지만, 본래 자연철학자로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자연을 탐구했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 법칙을 찾아내는 것,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모두 철학의 행위다. 그들이 수학을 언어로 삼았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썼다. 지금도 고전으로 불리는 그 책의 원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물리학'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세계는 신이 만든 질서였고, 그 질서는 수학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시계로 보았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운동은 외부의 힘에 의해 설명된다. 신이 만든 이 기계장치는 완벽하고도 예측 가능하며, 오차 없는 구조로 작동한다. 그 믿음이 결정론이다.
아인슈타인은 달랐다. 기독교적 신앙은 없었지만, 세상은 이성적이고 조화로운 질서 속에 있다는 철학적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특수상대성 이론을 통해 광속 불변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은 결정론자였다. 확률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양자역학의 흐름 속에서도 그는 말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그가 말한 '신'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이 무질서하게 구성되었을 리 없다는 철학적 확신의 상징이었다. 아직 다 설명되지 않았을 뿐, 세계는 질서 안에 있다고 그는 믿었다.
나는 그들의 이론이 단순히 관측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은 관측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 관측을 해석하는 방식은 언제나 인간의 철학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본 것은 세계였지만, 그 세계를 읽어낸 방식은 각자의 믿음과 시선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다. 30년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공통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렵다'는 두려움. '왜 이걸 해야 하냐'는 불만. '그래도 시험에 나오니까'라는 체념.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어떤 절망을 느낀다. 과학이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점수와 서열의 기호로만 남아 있는 현실.
예전에는, 아니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학교마다 '제물포'라는 별명을 가진 물리 선생님이 한 분씩은 꼭 계셨다. "재 때문에 물리 포기 했어." 학생들이 장난처럼 내뱉는 이 말은, 겉으로는 웃음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들을 때마다 어딘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른다.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이 단순히 한 교사의 역량이나 수업 방식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속에 우리 교육의 치욕을 본다. 그리고 더 깊게는, 물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미리 단념하고 등을 돌리게 만든 이 사회의 무지와 무관심에 대한 치욕이기도 하다.
물리학은 원래 그런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수치와 그래프 이전에, 세계를 향한 경이로움이었고, 삶을 구성하는 근본에 대한 탐구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공식 몇 개와 시험 점수로 환원시켜 버렸고, 사람들은 그 왜곡된 잣대를 들이댄 채 물리학을 '지겹고 무서운 과목'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그렇게 물리학은 점점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언어에서, 학생들이 가장 먼저 포기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 슬픔이, 때때로 '제물포'라는 농담으로 전해질 때, 나는 그 말의 가벼움보다 그 뒤에 깔린 무게 없는 시선에 더 마음이 무너진다. 그건 단지 나 하나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가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방식으로, 더 이상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다리를 놓고 싶다. 다시, 철학에서 시작된 그 길로.
물리학은 오랫동안 도구적 학문으로 다뤄져 왔다. 입시를 위한 과목, 공학의 기초, 문제를 풀기 위한 기술. 그것이 전부였다. 철학은 지워졌고, 질문은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물리학은 다시 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가 처음 이 세계에 던졌던 질문들, 그 원초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왜 사과는 떨어지는가. 왜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가. 왜 우연과 질서는 서로 닿아 있는가. 왜 어떤 존재는 나를 울리고, 왜 어떤 말은 파동처럼 내 안에 오래 남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물리학이다. 그리고 동시에 철학이다. 경계는 애초에 없었다.
나는 아침마다 창을 연다. 새벽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고, 작은 그림자가 벽에 드리운다. 그 빛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굴절되어 내 방까지 도달했는지를 생각하면, 세상이 잠시 멈춘 것 같다. 행복이가 내 곁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작은 눈동자 속에 반사된 내 모습. 우리는 서로의 빛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의 파동이다. 소리 없이 진동하는 감정의 파동.
나는 생각한다. 물리학은 우주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관계의 언어이기도 하다. 작은 표정, 사소한 말, 지나가는 손짓 하나에도 물리적 진동이 있고, 그 진동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 인간은 파동의 존재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조심스러움 속에서 삶은 깊어지기도 한다.
나는 교실에서 물리학을 가르치지만, 사실은 세상을 보는 법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이 공식이 어떻게 나왔는지가 아니라, 왜 이런 질문이 필요했는지를 말하고 싶다. 어떤 아이는 나에게 묻는다. "선생님, 이건 인생에 도움이 되나요?" 나는 말없이 창밖을 보며, 천천히 이렇게 답할 수 있는 물리학 수업을 하고 싶다. "너는 너 자신에게 물을 수 있게 될 거야. 너의 세상은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그때 너는 이미 물리학을 알고 있는 거야."
사랑도, 이별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진동이고 파동이다. 때로는 상처가 되고, 때로는 회복이 되며, 때로는 변화가 된다. 그 모든 것 안에는 물리학이 있다. 내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공식이 아니라 이런 시선이다. 존재를 이해하려는 태도,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그리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경이로움.
나는 언젠가부터 물리학을 하나의 방식으로 부른다. 공식이나 그래프가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려는 태도. 그것은 파동이고, 진동이며, 에너지이고, 힘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거의 모든 것의 물리학'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