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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승 Oct 14. 2023

귀국 비행기에서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길었을 여행이 감사하게도 잘 끝났다. 아프지도 않았고 잃어버린 것도 없다. 큰 걱정도 없었고 떠나는 아쉬움도 없었다.


5년 전 스무 살 여름에 혼자 한 달 떠났던 미국 여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것들이 변하지 않았다. 혼자 다니고, 계획을 대충 머릿속으로 세우고, 돈을 아끼는 여행을 했다. 음악 들으면서 무식하게 걸어 다녔고, 자연이랑 미술관 보는 게 좋았다.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꼭 하고자 했다.


동시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욕심을 덜어낼 줄 알게 되었고, 일정이 여유로워졌다. 돈을 아끼되 쓸 때에는 아끼지 않고 썼고, 술을 종류별로 매일 마셨다. 정확한 목적지가 사라졌고 길을 잃어버리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가방에 필름카메라와 책이 생겼고, 캐리어는 억지로 누르지 않아도 쉽게 닫혔다.


여행 중간중간에 내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많이 알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5년 동안 내 가치관에 맞는 지혜를 조금이나마 얻을 수 있었구나 생각했다. 내가 모래로 만든 벽돌에서 진흙으로 만든 지점토가 되고 있구나, 나 앞으로 잘 살겠다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내 삶이 강 위의 카약이라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구나. 주변은 조금밖에 보이지 않지만 앞은 괜히 무섭고 뒤는 괜스레 아름답게 보이는구나. 분명 지금껏 겪어온 것보다 크나큰 굴곡이 있을 것이고, 다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겠지만 주변 소중한 사람들에게 도움 받고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느꼈다.


여행은 일상의 부재인만큼 이제 놀만큼 놀았고 다시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이런 여행이 있는 정도의 삶이라면 더없이 행복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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