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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승 May 19. 2023

옥수역

나는 매봉역에서 24년을 살아서 3호선이 친숙하다. 3호선은 압구정과 옥수 사이에서 한강을 건넌다. 압구정역을 지나면 열차가 슬슬 경사를 타며 올라가고, 점점 주변이 밝아지다가 동호대교에 올라탐과 동시에 한강 전경이 창문에 확 펼쳐진다. 서울에서 이만큼 드라마틱한 순간이 또 있을까? 어렸을 때는 3호선을 탈 때마다 엄마한테 오늘은 한강을 건너는지를 꼭 물어봤다. 압구정역에서 문이 닫히면 앉아있던 의자에 무릎을 꿇고 돌아서서 설레어했던 기억이 있다. 강을 중간쯤 지났을 때 엄마를 보려고 고개를 돌리면 반대쪽에 타 있던 분들이 신문이나 책을 잠깐 덮고 나와 같은 창문으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친 분들은 귀엽게 바라봐주시며 엄마랑 이런저런 (아마도 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 장면은 아직까지도 참 소중하다.



중고등학교 때는 3호선을 타고 어딜 멀리 갈 일이 없었다. 대학생 때 지하철로 강을 건너는 것은 대부분 취하기 위해서나 취한 후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작년 어느 날 3호선을 타고 압구정역에서 문이 닫히는데 날씨, 시간, 분위기가 딱 어렸을 때의 그 기억과 같았다. 보던 핸드폰을 놓고 오랜만에 열차의 경사를 느꼈다. 주변은 점점 밝아졌고 마침내 한강이 나타났다. 시간이 한참 흘러서도 내가 그 기억 한가운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며 앞사람들을 보았는데, 열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반대편을 멍하니 바라보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아 보일까 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소중한 기억에선 사람들이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지금은 모두가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여태껏 강을 지나칠 때마다 창 밖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이 변한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무언갈 잃어버린 걸까.



이 날의 속상한 생각에 그다음부터 강을 건널 때면 오기로라도 핸드폰을 넣고 강을 보려고 한다. 남들에겐 서울 처음 올라온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도 그 1분 남짓의 별 거 없는 시간이 좋다. 어딜 가고 있었고 뭘 해야 하는지를 잠깐 잊고 나면 한강은 그때도 지금도 그냥 흘러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오듯 옥수역 가벽이 나타나면 생각은 일상으로 금방 돌아가지만 조금은 씩씩해진 느낌이 든다.



한국인은 공부하랴 일하랴 게임하랴 바빠서 하늘을 못 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늘 볼 정신도 없이 어딜 바쁘게만 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렸을 땐 다들 ‘구름 진짜 빠르다’ 하면서 멍 때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슬프다.



그래서, 당신이 삶에 치이던 중 마침 3호선을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고, 이 글이 생각났다면, 노력을 들여서 창 밖을 한 번 바라보자. 지하에만 있다 잠깐 숨을 쉬러 올라온 열차에서 조금의 씩씩함을 얻게 될 것이다. 지옥철은… 예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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