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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 ChoHeun Apr 29. 2023

그렇게나마 파리에 다녀왔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2005년 여름, 파리에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와 중학교 1학년 동생을 데리고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루브르와 모나리자를 보고 크로아상을 먹고 루이비통을 샀지만, 나에게 파리란 여전히 간 적 없는 도시다. 패션과 미식, 예술과 낭만이 있는 세계 문화의 중심지.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모인 그곳을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열망의 조각들을 캐리어에 끌어 담고 훌쩍 떠나기엔 14시간 아닌 1시간을 이동하는 채비도 제약이 많은 현실 속에 있다. 별달리 남은 것조차 없는 그 나라에 머문 기억이 후회스럽다. 그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죄송하지만 아빠, 헛돈을 쓰셨네요.




*

 최근 2월 임윤찬이 파리에서 공연한 베토벤 연주를 유튜브로 재생하며 부슬비가 내리던 날의 전시장 풍경을 떠올린다. 예술의 절대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혹은 동료로 만나 서로 교류하며 현대미술사의 흐름을 만들어간 거장들의 작품이 ‘이건희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원형의 간결한 공간을 빙 둘러 함께 걸려있다. 당장 파리로 날아갈 수 없는 2023년의 나는 그곳의 음악회 영상을 찾아 듣고 그곳에서 피어난 그림과 도자기를 보며 그 도시를 갈망하는 마음을 써 내려간다. 결국 짐을 푼 건 동네 스타벅스인들 내가 조합한 ‘파리 환상’ 속, 미술관에 있던 순간만큼이나 이후 복기의 시간이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예술과 글은 나의 답이 가려진 삶과 빠듯한 일상의 틈 사이로 행복을 착즙하는 비밀스런 살길임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은 특별히 빠리지앵의 느낌으로 에스프레소라도 한 잔 마셔볼 걸 그랬나 보다.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을 통해 거장들이 서로에게 표현한 우정과 존경의 감정으로 충만했던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나마 파리에 다녀왔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남프랑스 마두라 공방에서 만들어진 피카소의 도자기였다. 세련되고 위트 넘치는 감각으로 빚어진 90점의 작품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감을 분출하고 있었다. 누추한 비유 같지만, 백화점 명품관에 당장 디스플레이 되어도 최신상 그릇, 접시처럼 보일 법한 경이로운 현대적 감성이었다. 그는 천재다. 유치원 다닐 적의 너 다섯 살배기 딸부터 그림이라고는 평생에 문외한인 환갑 넘은 우리 엄마까지도 ‘피카소’를 듣지 못한 이는 없다. 샤갈, 모네, 고갱은 몰라도 피카소가 얼마나 대단한 화가인 줄은 모두 안다. 예술사적 여러 의미를 제쳐두고라도 분야에 있어 단 하나의 이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이다.      


 진열장 너머 반듯하게 자리한 도자기를 코가 닿도록 가까이 들여다본다. 위대한 자취를 남긴 채 지금은 살아 존재 하지 않는 거장의 손길. 갓 구워내고 칠한 듯한 섬세한 터치감이 소름 돋는 생생함으로 전해졌다. 붓이라는 도구를 쥐고 캔버스 위에 표현해낸 그림과는 또 다른 전율이었다. 흙을 주물러 이토록 유려한 형태를 창조해낸 천재적 열정과 자유로운 온기가 시공간을 초월한 저릿함으로 밀려왔다. 생전에 그가 사랑했던 올빼미와 염소는 황홀한 만치 아름답고 경쾌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초상화 역시 피카소가 미술을 시작한 유년 시절부터 말년까지 가장 많이 제작한 작품이다. 인물은 그에게 가장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었고, 동일한 모티브를 반복해서 그리며 하나의 대상을 다양하게 확장해 가는 실험을 즐겨 했다. 전시된 도자 가운데 다양한 얼굴 시리즈는 감상하는 내내 웃음이 번지는 그야말로 ‘귀염뽀짝’ 매력으로 넘쳤다. 여행 중 파리의 어느 빈티지 상점에서 발견한 접시였더라면, 그 깜찍함에 반해 두말 않고 지갑을 열었으리라, 마음가는대로 상상을 얹어본다.      




나는 항상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그렇게 하면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피카소 -


 예술을 대할 때 나는 그것을 깊이 생각한다. 쫓기는 일상에 잠식당하고 허덕이며 수동적으로 살아온 세월을 치유하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인 최후의 의지가 살포시 예술에 닿았다. 우연히 내려앉은 그것은 깨어질 듯 소중한 형상처럼 고귀하고 숭고하다. 무엇이든 전문적으로 배워야 제대로 익힐 수 있다는 고지식함 때문인지, 정형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한 나로선 그림과 작품을 마주할 때 한없이 겸손해진다.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고, 돌아 나와서도 며칠을 생각한다. 숨 바쁘게 살아 온 동안, 걸으면서도 생각하고 쓰면서도 생각하는 몰입의 경험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세계의 것이었다. 까마득히 모르고 살 수도 있었던 것들을 해 나가는 중이다.

 왜 하필 전시회에 가게 되었을까. 무엇이 나를 그 곳으로 이끌었을까. 아직은 미약하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한다. 내 인생에도 그림과 함께 ‘사유’라는 것이 귀퉁이에 들어왔다. 그것은 내밀한 기쁨이자 어지러운 삶 속의 나지막한 확신이다. “그렇게 하면 할 수 있게 되리라.” 하물며 천재의 일생도 각고의 노력을 통한 몰아의 경지에 있었다.     


 미술관을 돌아 동물원을 지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술 작품 한 점을 두고 나의 삶을 되짚고 화가의 생을 그리고, 문득 파리로 떠나고픈 환상들을 차곡차곡 수집해 온다. 그것들을 모아 어느 이야기를 엮을 수 있는 때까지, ‘내가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을, 보는 것을 사유하는 것을 쓰는 것을, 천재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계속해 보려 한다. 실은 최근들어 중심이 휘청였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숙고하는 삶이라는 믿음을 다시 붙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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