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울대리 Mar 25. 2024

좀 뻔뻔해지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 시절에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하던 도중, 승하차 벨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님께서 문을 열어주시지 않고 승차장을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나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버스 내부 좌석을 둘러보았는데 모두들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만요!’라고 외치는 것이 왠지 싫었고, 부끄러웠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그 1분 1초의 순간이 나는 못 견디게 힘들었다. * 돌이켜보면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는 늘 주목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른이 지나서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는데, 그때에 나는 ‘잠시만요! 기사님! 내려주셔야 해요!’라고 당당히 외치고는 내가 내렸어야 하는 승차장에 내렸다.






5년 전, 연을 끊었던 친척 오빠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었다.


- 000 씨 핸드폰 맞나요? 잘 지냈니? 나 00 오빠인데 기억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래도 아들 (나의 아버지) 이 와야하지 않겠냐?


그 전화 첫마디부터 내 온몸에 피가 거꾸로 곤두박이칠 치기 시작했다.

그 첫마디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큰오빠였던 사람은 이제 한 가장이 되었고 연을 끊은 우리 집을 마치 불효자식 취급하고 있었다. 돈을 내놓으라며 독촉하는 사채업자 보다도 더 한 선과 예절을 밥 말아먹은 전화에 나는 침착히 장례식장 주소를 요청했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 참을 분노에 차서 울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으며 입 밖으로 쌍욕이 나올 수준이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꾹꾹 참고서 나의 아버지를 위해 침착히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서야 내 핸드폰이 자동녹음이 되어있어서 통화를 다시 한번 듣게 되었는데, 내가 화를 내고 쌍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나름 위안을 삼았고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고 한 참 후에서야 큰고모라는 사람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참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연으로 조부모님과 큰고모, 큰아빠, 친척들이 우리 가족에게 행했던 폭력적인 언행과 행동은 상처를 받은 우리 가족의 몫이었다. 매 명절은 나와 내 동생에게는 고역 그 자체였다. 고된 시집살이 속에서 엄마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마음씨 고운 막내아들을 꿰어난 독한 사람이었고, 그 댓가는 자식 앞에서 머리채를 잡히거나 뺨을 맞거나 혹은 아버지가 없어서라는 말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할머니에게 남겨진 고작 2억짜리 단독주택 전세를 서로 나누어 가지겠다며 막내였던 우리 아버지를 내쳤을 때 아버지는 그제야 가족과 연을 끊겠다며 몇 년 내내 술로 지새우셨다.


그런데 돌아오는 취급은 불효자식 취급이었다. 큰 오빠는 나의 전화 통화 이후로 장례식장 주소를 넘겨주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던 고모부, 큰아버지 모두 우리 가족에게 ‘연락하라’ 는 문자 외에 장례식장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인천에서 서울을 오고 가며 간병호를 했던 우리 가족이 받은 취급은 우리 부모님이 사 온 음식 때문에 급체를 했다며 병이 악화되었다는 고모들의 핀잔이었다. 실제로 고모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생사를 오고 가는 할아버지에게 투석을 하겠노라며 반강제적으로 행한 무지한 결정 덕분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투석 2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할머니를 모시겠노라며 제일 큰 재산의 지분을 가져간 작은 고모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고, 그 이후 요양원에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배경을 나는 25년이 넘게 꾹꾹 참아왔고, 그것이 미덕이라 여겼다.
자식으로서 그리고 가족으로서. 하지만 참으면 호구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명백히 보여준 내 가치관에 가장 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기에 서술할 수밖에 -


큰고모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출장길에서 받은 전화였는데 그 전화를 끊고서도 손과 발이 벌벌 떨렸다. 한 동안 지하철 승강장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더 이상 벽 뒤에서 숨죽여 전전긍긍하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가족을 지켜도 좋은, 가족을 위해서 한 마디 말을 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 결국 ‘이러나 저러나 똑같다’는 인생의 진리를 조금은 받아들이고 있어서 인 것 같다. ‘이래도 G랄, 저래도 G랄’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맞는가? 를 생각했을 때 조금 뻔뻔하게 살아도 좋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무자비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내 권리는 적당히 챙기면서 내 멘털을 적당히 보호하면서 살아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를 매 순간 마인드셋을 하도록 만든다.


나를 위해서 조금은 뻔뻔해져도 좋은 나이

서른 넷이다.



작가의 이전글 서른, 나의 동굴이 필요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