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택 장애를 앓고 있다.
그래서 점심 메뉴를 단순하게 선택하는 것도 잘하지는 못한다. 타인의 눈치도 보면서 센스 있게 메뉴를 선정하는 일,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어느 것도 좋은 애매한 선택 장애를 겪는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 오히려 독불장군보다는 애매모호한 줏대 없는 사람이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4살 무렵부터 엄마는 내가 한 고집하는 아이라서 참 키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나는 혼나는 기억이 대부분이다. 부모님 그리고 주변 아줌마들에게. 특히, 주변 아줌마들에게 불려가서 혼나는 적이 많았는데 대부분 그런 상황은 내 동생을 건드린 동생의 친구들에게 내가 혼을 내주다가 혼나는 상황이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나는 내 동생을 지키려던 것뿐이고, 오히려 내 동생이 약하다는 이유로 해를 가했던 아이들의 부모에게 나는 마치 왕따를 주도한 철없는 누나처럼 늘 혼이 났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 편을 들지 않았다. 알아도 모른 척이었다. 후에서야 엄마는 정말 몰랐다고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그런 ‘혼’ 이 나야지만 내 고집이 꺾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늘 조용했고 내 고집만큼은 늘 꺾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불쑥, 내 단전 밑에서부터 ‘이건 아니야! 이건 내 마음대로 할래!’ 라며 소리치는 내 3의 자아가 튀어나와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결정을 내리게끔 큰 역할을 해왔다. 당최 내가 이 남자를 왜 만나야 하는지 모를 연애 문제에서부터 도대체 내가 이 회사에서 무슨 존재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직업까지. 나는 알게 모르게 고집을 죽여놓고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알게 모르게 나는 어딘가에서 내 고집과 아집을 뿌리째 꺾어내지 못한 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도 하다.
20대의 내 인생에서 선택의 기준은 모두 ‘자존심’이었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는 시기였다. 그때 내 자존심을 한 번씩을 꺾는 선배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1~2일 정도만 울고서는 그다음 날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뒤에서 나를 손가락질하더라도 곧잘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앞에서는 강한 척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는 늘 집에서 혼자 있을 때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30대의 내 인생에서 선택의 기준은 모두 ‘행복’ 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혼자 있는 걸 즐기면서도 나는 그 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고, 그 행복에 선을 넘는 순간마다 연인 혹은 직장에서 정확히 세 번만 참고는 그 이상은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마치 내 행복한 삶에 조금이라도 선을 넘고 발을 딛고 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불통 대마왕이 ’ 당장 이곳에서 나가버려!‘ 라며 조금의 여유도 없이 No라는 답을 내려주기도 한다.
내 고집을 꺾을 수 없기에 엄마는 내가 한 사회인으로서 잘 헤쳐나갈 수 있을지를 걱정했지만, 반면에 엄마가 꺾어놓은 고집 덕분에 나는 그 고집을 잘 숨기면서도 으레 고집을 내세우지 않으니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줏대가 없는 사람으로 늘 호구가 되어 살아왔다. 어떤 것이 맞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겨우 서른넷 밖에 되지 않았는데 늘 모든 삶에서 ’ 고집을 내세워! 매일 싸워!’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고집을 잠시 내려놓고 한 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상황들이 빈번히 생기는 것이 사람 사는 삶 아니겠나, 그러나 서른넷이 되고서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하나의 고집은 ‘내 행복은 내가 정의한다’는 것이다.
퇴사도 이직도 독립도 여행도 무언가 새로운 시작도 무언가에 대한 포기도. 그 모든 결정권은 결국 나의 몫이고 나의 고집스러운 가치관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기에 수 백번의 울림을 통해서 결정해 온 일일 것이다. 물론, 그 이후의 일까지 생각하고 저지르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 이후에 결과가 부정적이면 부정적인 대로 긍정적이면 긍정적인 대로 배움의 가치는 더 늘어날 것이고 조금 더 내 인생에 대한 아집을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고집불통을 가슴속에 하나씩 품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경험치와 인사이트가 더해져 그 고집은 나날이 선명해지고 명확해지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이고 그리고 그 끝에는 항상 ‘나’를 향하게 된다.
나는 아직 좀 더 고집불통이고 싶다.
내 고집만을 내세워 내 행복만 추구하며 살아갈 준비를 하는 서른넷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