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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ver young Oct 23. 2023

협상의 경험 - 정반대의 주장에서 공통된 방향 찾기

복수 전공을 하느라 9학기를 다녔는데, 4학기를 남기고 공부에 몰두하려던 때에, 선배들 다수가 학과 학생회 기획부장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복수 전공으로 다른 학과 수업이 더 많고, 미술 동아리도 열심히 하던 때여서 수학과에서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는데 왜 들 그러시는지. 못한다고 계속 빼다가 못 이긴 척 수락했다. 이런저런 마음에 빚도 있고, 기획부장이면 회장, 부회장 다음이니 부담이 크지 않을 듯해서였다.


그런데 큰일이 봄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시작됐다. 공학동 5층(최상층) 구석진 작은 방을 학생회실로 쓰고 있었는데 그것을 비우라는 것이다. 학과장 교수의 지시는 어디로 옮기라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비우라는 것이었다. 주장의 요지는, '공학동은 연구와 학습을 위한 공간이므로 이와 무관한 용도로는 어떤 것도 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새로 부임한 학과장의 단호한 지시였다. 나를 포함한 새로 꾸려진 학생회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과 환영회 준비로 학교에 머물고 있었는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학생회실은 구석지고 접근이 불편해서 이용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행사를 위한 집기들을 보관하고, 만나서 회의할 때 쓰는 용도였다. 활발하게 쓰지는 않아도 그래도 분명한 용도가 있는 공간인데, 이사 갈 대안도 없이 빼라고 하니 신임 학과장이 원망스러웠다.


일단 학과장과 학생회 사이의 첫 만남을 가졌다. 학생회 대표는 회장, 부회장, 그리고 기획부장인 나. 학과장은 우리에게 학생회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그리고 계속 쓰려는 이유를 말하라고 했고, 우리 이야기를 듣고 결론은 빼라는 명령을 확인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공학동에 둬야 할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상대의 주장이 수학 교수님 답게 아주 명확했다. 거기에 비해 '여태껏 쓰던 건데 그냥 쓰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수준의 우리 논리는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난 학생회의 본질부터 다시 생각해 봤다. 우리나라 대학의 학생회는 정권에 대항하는 학생 운동을 원활하게 하려고 탄생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인 그때는 학생 운동은 전혀 없고 학내의 사소한 일, 축제 기획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학교는 처음부터 운동권이 없었으므로 다른 학교의 학생회와 비슷하게 운영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내 결론은 '학부생 공부방'을 요청하는 것.


학생회 집기들은 적당히 기숙사에 보관하면 되고, 회의는 그때그때 정하면 장소는 널렸다. 남은 것은 가끔 서로 존재하는 날적이(일종의 방명록)를 두는 것이라 현재 5층 조그만 방을 쓸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학부생이 주인이 되는 공간이 전혀 없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니, 학과장의 요구대로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방으로 쓰겠으니 대신 학부생이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와서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 요구 사항이었다. 


결과는 서로가 대만족 하는 결과를 얻었다. 접근이 가장 편리한 3층 엘리베이터 앞에 기존의 방보다 서너 배는 넓은 공간에 컴퓨터 등도 넣어 줬다. 새로운 공간을 가장 편하게 사용한 것은 그해 신입생들. '학부생 공부방'이라는 개념은 전혀 없던 것이라 이것의 사용 문화는 그들이 만들면 되는 것이다. 선배들도 모르고, 교수님도 모르고, 그것을 제안한 나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만족하는 공간이 됐다. 신입생들이 다른 학과 친구들에게 "너희는 학부생 공부방 없어? 우린 도서관에 자리 없어도 거기서 공부하면 된다."며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협상에 나온 서로 제시하는 안이 정반대로 보일 수 있다. 여기서도 방을 빼라는 학과장과 그대로 쓰겠다는 학생회. 이렇게만 보면 방을 쪼개서 쓰겠다던가, 어떤 시간에만 쓰겠다는 식의 조금씩 양보해서 절충하는 안 밖에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학습용으로만 써야 한다'는 주장과 '학부생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만나면 '학부생 학습공간'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손해와 이익의 일차원에서 협상하지 말고, 2차원, 3차원으로 바꾸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협상 건도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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