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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orever young Nov 04. 2023

이과 남자의 문과 공부

알려는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 차이

너 자신을 알라

테스형(소크라테스)의 말이다. 이과 남자인 나는 이 말에서 '너'라는 2인칭 대명사와 '알다'라는 동사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것부터 분석을 시작한다. '너'가 테스형을 제외한 절대적 2인칭인지, 누구라도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상대적 2인칭인지 생각해 본다. 다음은 '알다.'에서 안다는 것, 앎에 이른 다는 것이 명확한 개념인지, 확인이 가능한 일인지. 보편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를 따져본다. 누가 말했는지는 관심밖이다. 예를 들어 피보나치수열을 많이 알려졌지만, 피보나치라는 수학자는 거의 모른다. 사람 이름인 것도 대부분 모른다.


반면 문과에서는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을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을 했는지 등등을 따진다. 그러다 보면 그가 무지와 앎을 구분하는 것을 강조했다는 주변 지식을 토대로 이 말의 의미를 따져볼 것이다. 한 문장의 의미를 알려고 그 말을 한 인물과 그 시대상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과 남자는 한숨이 나온다. 어차피 결론은 없고, 더 그럴듯한 이야기, 덜 그럴듯한 이야기로 논쟁거리만 될 뿐이다. 이과 남자 시각에서 이런 일은 가치 없는 우기기다.


학자들 이름으로 문이과를 비교하면, 이과에는 학자의 이름에 그 학문에 레벨, 또는 깊이와 특정 영역이나 분야가 담긴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라고 하면, 중3 레벨이다. 기하학적으로 직각삼각형의 변의 길이에 관한 식이고, 대수학적으로 수체계상 무리수를 도입해 유리수에서 실수로 확장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뉴턴이나 가우스는 고등학교 이전에는 사람 이름으로, 대학교에서는 힘의 단위(N)와 자기장의 단위(G)로 쓰일 때가 더 많다. 오일러, 라그랑주 등 이름만 들으면 몇 학년 과정인지 어떤 분야인지 대충 알 수 있다. 학자 이름으로 테크트리를 그릴 수 있다.


그에 비해 문과는 플라톤, 니체, 헤겔, 하이데거 등을 이름 읊는다고 몇 학년에 어떤 분야인지 알기 어렵다. 문학을 예를 들면 김소월, 백석, 이상 등을 논할 때, 이과라면 누구는 학부 레벨, 누구는 석사급, 누구는 박사급이라 예상이 돼야 하는데, 문과에서는 학부과제나 석박사 논문이나 어디든 언급될 수 있다. 테크트리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과생과 이과생은 수업에 임하는 태도도 다르다. 나는 이공계 학과만으로 구성된 대학을 다녀서 문과생과 수업을 같이 들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딱 1년 간 계절학기에 한시적으로 이화여대와 학교 간 교차 수강이 가능했다. 그해 여름 계절학기에 나는 우리 학교에서 일본어회화 과목을 이화여대 문과생과 같이 들었고, 다른 친구들 중에 이화여대로 가서 여성학 등을 수강한 사람들이 있었다. 남학생이 지나치게 많은 학교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그런 프로그램을 개설했을 것이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우리를 가르치던 교수가 '일본어 형용사의 과거시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때, 한 이대 영문과 학생이 질문을 했다.

형용사에 어떻게 시제가 있을 수 있나요?

교수는 매우 의아해했다. "형용사에 시제가 있어 시제를 가르치고 있는데, 왜 시제가 있냐고 하면...". 이건 드라마 <대장금>에서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하였는데, 왜 홍시맛이 나느냐고 물으신다면..."이런 상황이다. 질문한 학생도 눈을 끔벅끔벅.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누가 큰지 겨루기를 하듯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파악이 됐지만 수업 중에 튀는 행동이 될까 싶어 기다리다가, 문과 둘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일본어에서 형용사를 말했고, 저 학우는 영어의 형용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말고 일본말에서 형용사는 용언이라 시제활용을 하지만, 영어의 형용사는 우리말의 관형사와 같아 시제 활용이 없습니다.


그제야 두 사람은 형용사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을 알고 의문이 풀렸다. 문과 사람들이 단어의 정의를 불명확히 해놓고 서로 논쟁하는 것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파인만 씨가 '각자의 언어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때 수업 중에 튀는 행동 때문이었을까, 문과생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겨서 문과생들이 볼 때, 이공계생의 수업 태도가 뭐가 다른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이 교수님을 너무 공격적으로 대한다는 것이었다. 하긴, 이공계 수업에서 교수님이 칠판에 문제를 풀어주면 학생들은 조금만 틀려도 

선생님 저기 틀리셨는데요!

라는 말이 바로 나온다. 설명을 하면서 쓰다 보면 틀리는 일이 흔해서 틀린 것 지적해 주면 오히려 수업에 도움이 되므로 교수도 그다지 무례하게 여기지 않는다. 틀린 것이 칠판에 뻔히 보이는 상태에서는 눈에 거슬려서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빨리 지적하고 고치는 것이 낫다. 하지만 문과 수업은 맞고 틀리고 가 명확하지 않아 그러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우리 학교 학생 중에 이화여대에 가서 수업을 받고 그쪽 교수랑 논쟁하고 싸우다가 평점을 아주 형편없이 낮게 받는 일이 잦았다.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분위기라 하는데, 영화 <넘버 3>에서 송강호가, "라면만 먹고 뛰어 금메달 딴 현정화"라고 하자, "임춘애입니다. 형님"이라고 고쳐주니, "내가 현정화라고 하면 현정화야!"라고 우기는 장면이 연상된다. 여하간 그래서인지 계절학기 교환수업은 얼마못가 없어졌다.


문과 쪽에서는 원로 교수님이 존경받는 분위기지만 이공계는 그렇지 않다. 실력으로 따져 파릇파릇한 젊은 교수가 훨씬 인기가 좋다. 노년의 아인슈타인보다 젊은 파인만이 교수로서 더 인기가 좋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문과 분야 교수로 은퇴하신 분과 꽤 오래 잘 지내왔던 분이 있었는데, 나의 이과적 태도로 사이가 틀어졌던 일이 있다. 명백히 틀린 말을 해서 잘못을 지적했더니 분위기가 싸~ 해지고 그 이후로 못 보고 있다. 평생 교수로 존경받다가 이과 놈에게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하시려나.


이과의 학습 방식은 단어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알고자 하는 논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쟁을 해도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의 논리에 집중한다. 교수가 실수로 틀려도 그 틀린 것만 지적하는 것이지 교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논리를 따지는 것이지, 그 말을 한 테스형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유시민의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를 일고, 나도 문과를 다르게 봤던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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