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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Feb 26. 2023

이베리아반도의 로마 ‘타라고나’, 스페인

타라고나 로마원형경기장(Amfiteatre de Tarragona)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달려가면 만날 수 있는 타라고나,  이곳을 바라보면 로마가 그들의 제국을 꿈꾸며 영토를 확장해 가면서 그들과 문화가 달랐던 다른 이민족들에게 그들의 문화를 어떤 식으로 전파시킬지 고민했던 로마인들의 고민의 결과가 보인다.


로마는 영토를 확장하며 그들만의 대제국을 꿈꾸었다. 전투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새로운 정복지와 식민지를 품으면 제일 먼저 한 것은 로마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정복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도시의 물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수도교를 만들고 이민족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로마포럼과 같은 로마의 문화를 이식시켰다..


로마의 우수성을 이곳 사람들에게 뽐내기라도 하듯 로마 건축물을 자랑스럽게 선보이며 로마가 대단하구나 하는 의식을 심어주기도 한 듯하다. 요즘으로 치면 이민족들에게 로마가  지배해야 한다 하는 가스라이팅 효과를 노린 것 같다. 로마인들은 이곳 타라고나에 시칠리아 바다를 품은  시라쿠사 원형경기장처럼  지중해 바다를 품은 형태의 원형경기장을 멋들어지게 만들었다.


로마에 적대감을 갖고 있을지도 모를 이곳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아무래도 로마가 그동안 그들의 노하우로 확인했던 정복지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방법을 찾아서 곳의 지형에 알맞게 건축기술을 적용했으리라 예상된다. 타 원형경기장을 통해 시민들에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며 그들의 의식을 정치나 이념 쪽에서는 관심을 돌리고 눈에 바로 보이는 특이한 구경거리에 관심이 쏠리게 였다. 로마인들은 콜로세움의  잔인한 경기형태를 이곳에서도 선보이며 잔혹한 게임 속에서 자신들의 힘도 과시하면서 정복지 사람들의 마음도 얻으려고 했던 것이다.

과거 구축하거나 개축한  그리스인들의 원형경기장을 통해 로마인들은 고대 원형경기장에서 얻어낸 그 효과와  건축술을 파악해 낸 지혜를 비탕으로  바다의 풍광을 마주한 이곳의 지리형태를 바라보면서 이곳의 만들어질 원형 경기장 형태를 상상해 냈을 것이다. 경기장에서는 지중해 바다의 풍광을 감상하며 동시에 바다를  통해 이곳을 침입하려는  외부의 침입자도 함께  지켜볼 수 있 이곳의 장점을 살려 경기장을 만드는  지혜를 로마 사람들은 발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바다를 품은 원형경기장의 풍광을 바라보면, 특히 일몰 시간에 마주하는 행운이 있다면 특이한 경험을 할 것이다.

 

지중해가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대제국을 이룬 로마사람들의 지혜와 고민이 담긴 건축물을 마주하며 순간 벅찬  감정이 밀려와 괜히 울컥해지기도 하는 것은 나만 느끼게 되는 감정은 아닐 것 같다. 타라고나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기차는 갈 때도 마찬가지지만 지중해 바다를 접하며 달리기 때문에 기차 안에서 생각과 감상에 젖기 좋은 시간이 된다. 특히 바르셀로나로 돌아오는 길은 로마인들이 이민족국가에 그들의 꿈과 정신을 어떻게 심을지 고민했던 건축물들을 잔뜩 보고 돌아가는  길이니 지중해바다를 바라보며 로마인들이 꿈꾸었을 대제국을 향한 꿈을 생각해 보기에 좋은 시간이 되었다.


로마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도로를 통해 식민지의 물자를  빠르게 로마로 이동시키면서 이민족이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터득한 높은 기술을 뽐내며 자신들에게 통합되는 것이  정복지 시민들에게는 오히려 영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가스라이팅하는 것이 로마사람들이 포에니전쟁을 통해 이베리아반도  타라고나를 접수하며 이곳에 작은 로마를 만든 실제 목적이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살짝 든다.


실제 원형경기장과 극장을 시민 통치도구로 사용한 것은 이미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알렉산드로스 제국에서도 보이고 있고 로마포럼도 이전의 고대 폴리스문화와 아고라의 방식을 로마식으로 개선한 것 외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로마구획 역시 고대건축가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로마건축에서 보이는 것과 동일한 격자형식의 도시건축설계가 보이는 데 도시를 건설하며 로마구획으로  다시 적용시킨 것은 이전의 그들이 보았던 고대의 발전된 건축 기술을 로마 사람들이 빠르게 로마와 정복지에 적용하면서 더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 로마가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는 로마식의 원형경기장은 실제로는 그리스원형경기장과 고대 원형경기장을 로마가  다시 로마식으로 개선시킨 것도 로마가 초기부터 건축한 것처럼  최초 건축연도가  혼용된 것도 있어 보인다. 이집트의 알롁산드로스 로마원형기장도 600명 정도 수용한 경기장의 규모와 건축된 위치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일반인인 내 눈에도  고대부터 원형경기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 데 건축시기가 로마활동시기로 기록된 것은  사실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타라고나의 원형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보다는 건축연도가 좀 더 빨라 보이는 데 이유는 타라고나의 전성기였던 발전시기가 기원전 1세기경  가장 크게 번성했었고 경기장을 만들기 위한 자본  조달이 플랑드르지방에서 투입된어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짐작건대 타라고나의 전성기에 자본투입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예상이 되고 이미 혼돈과 쇠락기에 접어든 시기에 자본이 투입되 경기장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로마장군 스키피오가 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곳에서도 승부를 벌였던 시기, 결국 이곳을 품게 된  로마가 이곳을 이베리아의 로마 수도로 만들려고 발 빠르게 움직였던 로마인들이 이곳에 부여한 의미 등을 감안하면 이곳 원형경기장과  비슷한 시기에 콜로세움이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곳에 먼저 원형경기장 건축을 시작하고 오히려  로마화재 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의 콜로세움  자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놓고 이곳  원형경기장 건축에서  로마사람들은 아이디어를 얻어   콜로세움 건설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개인적인 상상을 해본다.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건축결정 이후 이곳  경기장  건축의 영감이 비슷한 시기에 건축되었을  콜로세움  건축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한 로마 원형경기장들의 건축시기와  규모 위치 등 분석에 따른 것이다. 지금의 로마에 건축된  콜로세움 자리를 놓고 네로 죽음 이후 네로 별장자리에 콜로세움을 건축한 것은 당시 로마인들의 가장 큰 장점이 자신들이 경험한 노하우를  빠르게 실행 발전시킨  것으로 미뤄볼 때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타라고나에 짓는 원형경기장에서 영감을 얻고 네로 별장자리에 원형경기장을 건축하기로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그래 바로 이거 야하고 결정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원형경기장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다양한 엔터테인을 제공하며 관심을 뜨는 데 성공적인 도구로 작용하였다. 로마 원형경기장이라고 이름은 붙여져 있지만 로마시대 시작한 것은 아니고 그리스문화와 알렉산더제국시절에도 원형경기장과 극장이 보이고 있으니 고대의 문화와 그리스의 문화를 로마가 흡수하여 로마원형경기장으로 규모 등을 확대하여 로마가 많은 정복도시에 정복지에 전파한 것으로 추측되는 데 기록된 문헌이 있는 것은 아니며 개인적인 의견이며 다양한 원형경기장의 공개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며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시라쿠사의 원형경기장-바다를 품은 모습은 타라고나와 상당히 구조가 비슷함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로마의 만들어진 콜로세움으로 네로의 죽음 이후 혼란한 국민정서를 달래기 위하여 서기 70~72년 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  아들 티투스 황제에 완공되었는 데 콜로세움을 건설하기 전에 네로황제의 별장자리에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국민들의 관심과 황제를 위한 무엇을 하기보다는 이전에 원형경기장의 어려가지 장점을 보고 콜로세움을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양한 원경경기장

1) 콜로세움 : 서기 70~72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  79년에 콜로세움의 3층이 완공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 티투스 황제에 완공

2) 아를 원형경기장: 기원후 90년 완공

3) 시라쿠사 원형경기장: 1세기~4세기 사이로 추정, 그리스기절 건축 후 로마식으로 개조했을 가능성 높음

4) 베로나 :1세기 아우구스투스황제시절로 추정

5) 타라고나: 기원전   1세기 추정

6) 폼페이 원형극장:  기원전 70년

7) 요르단 암만 : 로마황제 안토니우스피우스를 기리기 위해 138~161년 사이 건립

8) 요르단 제라쉬(jerash) : 164-165 북부원형극장 남부는 별도 건립

9) 이집트 알렉산드로스 : 4세기~ 6세기 600명 규모로 추정컨대 그리스건립 후 로마가 4세기는 개선한 시기였을 듯

  

로마인들은 이곳에도 수도교를 지었는 데 세고비아의 수도교보다는 작은 형태였지만 이곳 역시  악마의 다리라고 불릴 만큼 당시 사람이 지었다고 믿기 힘들에 로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건축이었다. 타라고나의 현재 남아있는 로마인들의 건축물을 시에서는 묶음형태로 관광할 수 있도록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로마인들의 유적을 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어 로마 유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곳이 왜 이베리아의 로마로 불렸는지 알 수 있다.


새로운 점령지를 품으며 이곳 이베리아의 반도 지형을 이용하며 바다를 품은 로마경기장을 만들고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는 포럼을 지었다.   


로마에서 공화정을 원하는 민심을 다른 데 돌리고 그동안 왕조를 안정화시키고 세월이 흐르고 한 세대가 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사람들은 공화정에 대한 애정을 잊어버리게 돼서 권력자들만의 리그를 만들기 쉽도록 로마의 콜로세움이 지어진 목적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곳의 엔터테인세트도 역시 비슷한 기능을 기대하고 로마인들은 경기장을 건설하였을 것이라 예상된다.


로마를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엔터테인먼트를 경기장에서 제공하고 왕정을 세운 권력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한 것처럼 말이다. 타라고나에는 로마포럼을 만들어 이곳의 시민들을 위하는 형태를 보여주면서 로마극장과 서커스, 원형극장 같은 엔터테인을 위한 3종 종합세트를 구현했다.


원형경기장 쇼에 참가해야 하는 동물들이 하역해야 하는 바다가 근처에 있었고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엔터테인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타라고나의 시청설명서에는 타라고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데 타라코의 이름으로 이곳은 기원전 2세기와 1세기까지 급속도로 성장했고 카르타고 노바와 함께 서부 히스파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기원전 26년에 25년 동안 타라코는 로마 세계의 수도가 되면서 도시로서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로마 군대가 주둔하며 tarraco는 Hispania Citerior의 수도로 통합되었고 강력한 도시 개발의 지원을 받아 극장과 지역 포럼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원전 1세기 동안 도시는 성장하고 통합되었고 로마에서 혼돈기가 와서 68년 네로는 암살당했다. 네로암살 이후 제국은 전역에 홍역을 치르며 혼동을 치르면서 로마 장군 갈바는 스페인 로마 군단에 의해 황제로 지명되었으며,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황제 행세자들이 나타났으니 혼돈의 연속이 되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토대 위에 타라고나 같은 속주 수도를 통치 중심지로 삼는 몇 가지 중요한 행정 네트워크가 등장했고 이곳에서도 두 개의 포럼이 있었다.


원형 경기장에서는 검투사 싸움(무네라)과 사냥감 사냥(베나 네이션)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활동이 조직되었고 또한 원형 극장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처형장소이기도 했으니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라는 식으로 시민들에게는 경기장은 어려가지 의미를 주었을 것이다.


221년에 개조된 경기장은 259년 1월 21일, 기독교 주교 Fructuós 등 기독교인들이 산 채로 화형 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6세기에 이 순교자들을 위한 예배당을 짓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미라클 교회는 초기 기독교 대성당 위에 세워졌다.


풍경으로만 보면 멋진 바다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이곳의 이베리아의 로마도시가 된 시기는 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불리는 로마인과 카르타고인 사이의 군사적 대결이 벌어진 시기이다. 전쟁을 위해 기원전 218년에 로마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하였다.


그나이우스 스키피오(Gnaeus Scipio)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물리친 후 Tarraco 시를 떠났다. 공화주의 도시인 타라코(Tarraco)는 상부에 군사 캠프가 있고 이베리아 마을과 항구 주변의 주거 지역이 있었는 데 로마의 도시 통합은 신속했다.


로마 군사 주둔뿐만 아니라 히스파니아를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땅으로 본 상인들과 로마 시민들이 이곳으로 도착했다. 이곳 Tarraco를 중요하게 본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항구였는 데 로마 공화정의 가장 보존이 잘 된 유산은 romal wall이다.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승리와 히스파니아의 로마편입으로 기원전 2세기 초 romal wall이 건축되었을 것으로 본다. 가장 받아들여지는 설은 기원전 150년에서 125년 사이에 성벽이 큰 변화를 겪으며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2세기 동안 이 도시는 최후의 유흥 건물인 원형 극장까지 건설되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로마는 이베리아반도를 품고 영토를 확장하며 그들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성장발전하였다. 또한 그들은 영토를 더 이상 확장하기 어려운 대내외적인 시기가 도래하면서 그들이 이미 확장시킨 영토 안에서도 통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자 위대했던 로마도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모든 위대한 제국들이 시기의 문제였지 언젠가는 결국 쇠락하였듯이 로마도 영원한 제국을 만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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