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라졌다
'잠수이별'이란 연인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연락을 끊음으로써 연애가 끝나는 것을 뜻한다. 당해본 사람들은 '최악의 이별법'이라고 말한다. 백번 공감한다. 나도 잠수이별을 당한 적이 있다.
배우의 꿈이 좌절되고 혼자 도쿄에 갔다. 도쿄에 가기 전에 친구가 자신의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그 자리에는 그의 고등학교 동기라는 남자도 있었다. 그날 해어지며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지내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문득문득 외로웠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누군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공중전화에서 국제 전화카드를 이용해 한 번 본 그 남자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 지흰데. 기억하세요?"
"정말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반가워해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안도하는 동시에 설렜다. 그 역시 동기들보다 뒤늦게 시작한 인턴 생활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밤마다 통화를 했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 전에 몰래 먹는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은 호감으로 변했다.
일본어 학교 여름 방학 때, 나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한국에 갔다. 사실은 그가 만나고 싶었다.
8월의 삼청동 한복판에 무더운 낮의 열기가 지나고 저녁 하늘과 함께 선선한 바람과 함께 그가 나타났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건 분명 사랑이야.’
그는 틈틈이 병원에서 탈출했고, 우리는 탁한 방안의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듯 만났다. 2주 후에 김포 공항에서 그와 헤어질 때, 나는 이대로 영원히 그의 옆에 있고 싶었다. 등 뒤에 서있는 그를 두고 출국장을 지나 도쿄로 돌아온 날부터 나는 온종일 그만 떠올렸다.
4개월 동안 그는 조금씩 변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거나,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면 화를 냈다. 나는 그가 나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전공을 정하기 전에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인 거라고 짐작했다. 그가 더 달라지기 전에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급하게 짐을 정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너무나 바빠서 병원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사이 나는 원하지도 않은 취업을 했다. 백수로 있으면 그가 나를 하찮게 볼까 봐서. 크리스마스를 그의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신정 연휴에는 하루 정도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몇 번이나 들여다봤는지 모른다.
드디어 그를 만났다. 나는 나에게 소홀한 그에게 서운했고, 질투심을 유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를 좋아하는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는 버럭하고 화를 냈다. 필요 이상으로 과한 반응이었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나를 집 앞에 내려주고 그는 서둘러 떠났다.
그날 이후, 그는 전화를 하지도, 내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잠시 화가 나서 그런 거라고, 며칠 지나면 연락을 할 줄 알았다.
일주일, 한 달, 반년, 일 년.
그에게서 아무런 답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