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ctoria & Albert Museum
남편이 런던에 도착한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나단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혼자 호텔을 나섰다.
런던에 도착하기 전부터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런던에서 갈 곳' 리스트에서 맨 위에 적어놓은 곳으로 향했다.
Earl's Court 역에서 튜브를 타고 한 정거장을 지나, South Kensington에서 내렸다. 개찰구를 나와 V&A라는 표지판을 따라서 걸었다.
긴 통로 중간에 뮤지엄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니, 'Naomi'라고 적힌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기획전인가 보다.
패션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유리 너머에 있는 의상들을 '진짜 입으라고 만든 건가' 궁금해하며 바라봤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20대 후반까지는 나름대로 옷에 관심이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유행하는 옷들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값싸고 오밀조밀한 액세서리도 제법 사 모았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면서 디자인이 단순하면서도 너무 벙벙하지 않고 소재가 좋아 착용감이 좋은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도쿄와 뉴욕에서 혼자 살며서 옷장과 서랍에 물건이 꽉 차면 답답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도 고민하다가 사지 않았다.
점점 옷보다는 운동, 음식, 기초화장품처럼 나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들에 돈을 쓸 때, 더 만족스럽다. 여기에 책, 강의, 여행 같은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요소가 더해지면서, 옷과 패션 소품은 점점 더 후순위로 밀려났다.
V&A 박물관은 1852년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장식 미술, 디자인, 공예 전문 박물관이다.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유럽, 북미, 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지역에서 5,000년 동안 만들어진 280만 점 이상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말 그대로 세계의 '아름다움'을 정수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사는데 꼭 필요한 것 이상을 누릴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들이 예술을 누리고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이후 엄청난 시간이 흘러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그 진귀한 예술품들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참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볼 수만 있고, 손으로 만져보고 직접 쓸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정문을 들어서면 안내소가 있는데,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식물처럼 보이는 유리 공예품에서 미술관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V&A는 상설전시가 무료라 입장권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단, 특별전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런던에서 놀란 점 중 하나가, 소재와 내구성이 좋고 디자인도 아름다운 천 가방이 가격도 비싸지 않다는 거다. 대부분 만 원에서 2만 원 사이다. 보통 미국에서 이 정도 제품이면 2만 원 이상이다. 뮤지엄과 서점에 들를 때마다 보이는 예쁜 천 가방을 자꾸 싶어서 참느라 힘들었다.
신분이 높으면 세상을 떠날 때도 화려하다. 종종 '죽으면 다 똑같다'는 말을 하지만, 여기서 아름다운 대리석 관을 보고 있자니 사람이면 언젠가 다 죽을지언정, 그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죽으면, 주변 사람들은 '오늘 또 한 명이 죽었구나'하고 자신의 고된 일상으로 돌아갔다면,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만사 제쳐두고 모여서 몇 날 며칠 의식을 치르며 그 죽음을 기렸을 거다. 망자의 영이 죽은 후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예수님의 일생과 성경의 일화를 다룬 예술품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삶과 사후세계를 다루는 종교는 예술과 떨어질 수 없다.
미술관 어느 한 부분도 허투루 남겨진 곳이 없어보인다.
카페도 아름답다. 바닥에 깔린 타일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갈라진 금에도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겨있다.
소장품이 많아서 보다 보면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
런던에 다녀온 지 12년이 지나서도 종종 떠올렸던 뮤지엄 안에 있는 이 아름다운 카페. 당시에 갔던 여러 곳의 유명한 미술관과 박물관 중에서도 유독 이곳에 다시 오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서 혼자 홍차와 스콘을 먹으며 머물렀던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웨스턴 캐스트 코트(The Weston Cast Court)에 갔다. 유럽의 고대 및 중세 조각과 건축물의 실물 크기 석고 복제품(plaster casts)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압도적인 크기로 감탄하게 만드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David)’ 상이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 왕실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어 영국으로 보내진 석고 복제품으로, 진품은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에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 있다.
바로 뒤에 보이는 황금 문 같은 구조물은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Gates of Paradise)’ 복제품으로, 원본은 피렌체의 산 조반니 세례당(Baptistery)에 설치된 청동문이다.
높은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거대한 조각상들 안에 있는 초월적인 성스러움을 끌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큰 작품들이 많이 있으면 답답할 법도 한데, 전시실이 워낙 넓어 적당한 거리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2층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는데, 같은 작품이라도 보는 위치에 따라서 느낌이 달랐다.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았을 때는 거대해 보였던 다비드 상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엄지손가락 보다 작았다.
마치 인생에서 마주하는 과제가 가까이서 보면 크고 어려워 보였다가도, 거리를 두고 조망하면 별일 아니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렇게 인생의 고비 하나하나를 넘기다가 보면 저분들처럼 언젠가 숨을 멈추고 조용히 잠들겠지.
아시아 전시실이 꽤 크고 소장품도 많다. 그러나 한국 작품은 중국과 일본의 작품에 비해 적은 편이다.
그나마 박영숙 작가의 달 항아리가 전시실 중앙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위로가 되었다.
옛날 한국 조상들이 쓰던 장식물과 생활용품들을 볼 수 있다.
내가 V&A 미술관을 특히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소장품 뿐만 아니라 공간이 아름답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작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구성하면서도, 그 작품들이 놓여있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공간의 크기, 천장의 높이, 빛이 들어오는 정도, 작품들이 놓여있는 위치.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놓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어떤 전시실은 분명 실내임에도 야외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문을 통과하니,
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공간이 나왔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정도 크기의 나무 조각 작품. 인물들의 세밀한 표현이 놀라울 만큼 정교하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꾸준하게 일했을까?
문득, 릴케가 젊은 시인인 카푸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던 '예술가적인 삶'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는 시간으로 잴 수 있는 것은 없기에 1년도, 10년도 잴 수 없습니다.
예술가란 계산하지도 않고 세지도 않고 나무처럼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끌어져 내지 않습니다.
봄날 몰아치는 폭풍우 안에서도 여름이 오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은 반드시 옵니다. 마침 눈앞에 영원한 시간이 있는 것처럼 인내심 강한 사람에게로
조용히, 천천히.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층 복도 끝에 클래식한 카메라 컬렉션도 멋지다.
미술관을 전부 보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다. 하지만 늦어도 이른 저녁에는 남편과 나단이가 있는 호텔로 돌아가야 하고, 그전에 노팅힐에 가보고 싶었다.
언제 이곳에 다시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꼭 아침부터 오후까지 느긋하게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