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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BUMA 요부마 Feb 15. 2024

한국에 사는 조카, 미국에 사는 아들 3

그러다 문지기가 됩니다.

내가 미국에서 출산, 육아를 하는데 일등공신은 단연 친정 엄마였다.

엄마는 3개월 동안 산후조리를 해주었고, 아파트에서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도와주었다. 2개월 후 내가 둘째를 유산했을 때도 바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런데 왜 나는 엄마한테 잘 못하는 걸까....)


엄마는 9개월 정도를 미국에서 지내며 아주 좋은 점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문을 잡아주는 매너'다.

미국에서는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이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준다.

다음 사람은 "땡큐!"하고 감사함을 표시하고, 이번엔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올 때까지 문을 잡아준다.

다시 말해,  '문고리 바통 터치'를 하는거다.

여기서 예외가 있는데, 유모차를 끄는 엄마나 짐을 들고 있는 택배 기사 등. 손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그냥 지나가도 괜찮다.

"사람 많고 바쁜데 그럴 새가 어디있어?"하고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사람은 문을 잡아주는 행동이 숨을 쉬는 것처럼 익숙하다. 기계적으로 보일 정도로 사람 1이 문을 열고 잠깐 잡고 있으면 사람 2가 문이 닫히기 전에 와서 잡고, 사람 3이 또 얼른 들어와서 잡는다.

착착착!


엄마가 한창 같이 다닐 때는 나단이가 두 돌이 되기 전이라 항상 유모차를 끌고 다녔다.

그럼 엄마가 얼른 내 앞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고, 내가 편하게 통과했다.

종종 엄마가 혼자 나단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거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그럴 때도 언제나 누군가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한국에 가서도 이 '문 잡아주는 매너'를 시도했다는데 있었다.

나단이가 18개월 때, 우리(아기와 나는 3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내가 볼일이 있어 외출하면 엄마가 나단이를 봐주었다.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자주 롯데 백화점에 갔다. 걸어서 15분이면 갈 수 있고, 먹을 거 많고, 볼 거 많고, 쉴 데도 많으니, 최적의 장소였다.


엄마는 그날도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롯데 백화점으로 향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바람이 세서 그런지 백화점 문은 특히 무겁다.

엄마는 먼저 문을 열고 건물로 들어가던 아주머니에게 외쳤다.

"저, 문 좀 잡아주세요!"

아주머니는 문을 잡아주었고, 엄마는 "고마워요"라고 말하고 여유 있게 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엄마의 뒤통수에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꽂혔다.

"아니, 자기 문을 왜 나한테 잡아달라고 해?!"

아주머니는 잡아달라고 하니까 얼떨결에 잡아주기는 했지만, 아마도 엄마가 자신을 종처럼 부린 것 같아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내가 집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낮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끌탕하는 엄마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엄마. 여기가 무슨 미국인줄 알아?"

그날 이후로 엄마는 롯데 백화점에 들어갈 때, 왼손으로는 유모차 손잡이를 잡은 채로 몸을 앞으로 쭉 뺀 다음 오른손으로 문 손잡이를 온 힘으로 당겼다. 그리고 등으로 문을 받히고 유모차를 당겨와 뒤꿈치가 문에 끼기 전에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친구들과 롯데백화점에서 자주 만났다. 가깝고 편하기 때문이다.

대학 동기이자 베프인 A와 백화점 앞에서 만났다. A는 두 살 터울인 언니가 뉴저지에서 1살짜리 아들을 키우고 있었고, 마침 몇 달 전에 언니 가족을 만나고 왔다.  그래서 A는 미국의 '문잡이 문화'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유모차를 밀고 들어갈 수 있도록 A가 먼저 가서 문을 열고 기다렸다.

그때. 파스텔 톤 봄옷을 곱게 차려입은 스무 살 초반의 여자 세 명이 내 앞을 휙 스쳐서 문을 통과했다. 1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모야!!!" 나와 친구는 어이가 없어서 동시에 마주 보고 큰소리로 웃었다.

한 사람이 문을 잡고 있고, 유모차를 미는 엄마가 들어가려는 게 뻔한 상황을 의식조차 못한듯, 먼저 들어가버린 사람들.

예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를 알고 모르고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알기 어려운 것처럼, 배려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 하는 법을 모르는 거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한 뒤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을 했다.

공공장소나 건물을 들어갈 때 누군가 뒤에 가깝게 따라오고 있으면 문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내가 문을 잡고 있는데, 누구도 내가 잡은 문을 맞잡아주지 않는 거다.

그래서 내 뒤로 5명 정도가 지나고 더 이상 다음 사람이 오지 않을 때까지 나는 문지기처럼 문을 잡고 있어야 했다.


결국, 나는 문을 잡지 않기로 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지 않는 사회에서 '문 잡는 매너'는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거나, 속도를 지연시켜 불편함을 초래한다.

한국에서 유모차를 끄는 엄마라면 응당 '스스로 문을 열고 무사하게 통과' 할 정도의 스킬과 반사신경은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엄마는 기본적으로 자주적이고, 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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