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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BUMA 요부마 Feb 21. 2024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마음으로 간절하게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소녀: "도시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어서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워. 나가기는 더 어렵고."

나: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소녀: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열일곱 살의 나는 열여섯 살의 소녀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산책을 하고, 대화를 하고, 입을 맞춘다. 딱 거기까지다. 

어느 날 소녀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현실에 자신은 '그림자'라고. '진짜'는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다고. 

다른 동물은 없고 외뿔 달린 짐승이 산다. 사람들은 오래된 공동주택에 살며 간소하지만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 그들에겐 그림자가 없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없다. 따라서 나이를 먹지 않는다. 겨울이 춥고 길다. 

소녀는 도서관에서 일을 한다. 그곳엔 책이 한 권도 없다. '꿈 읽는 이'로 선택받은 사람만 들어가 오랫동안 보관된 꿈을 읽고, 다 읽은 꿈은 소멸된다. 그리고 바로 '나'가 그 꿈 읽는 이가 될 거라고. 소녀는 매일 밤 '나'를 돕는다고. 


나는 소녀를 순수하게, 열렬하게 사랑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사라졌다. '나'는 어떻게든 소녀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흔적조차 없다. 잊으려고 노력하지만 깊게 남은 화상 자국처럼 잊을 수 없다. 오히려 강렬해질 뿐이다. 나는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어 본다. 취직을 하고, 마흔이 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나는 소녀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그곳에 있을 소녀를 상상한다. 간절하게 그 도시에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집요하게. 


그리고 정말 그 도시에서 눈을 뜬다.  도시에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그곳에서는 그림자를 가질 수 없다. 본체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나'는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일을 한다. 소녀는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와 소녀는 매일 밤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다. 

내 그림자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며 목숨을 걸고 호수에 몸을 던져 탈출을 시도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도 현실로 돌아온다. 꿈인지 실제였는지 헷갈린다. 도시를 잊을 수 없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법을 모른다. 결국 오랫동안 일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시골에 있는 도서관에 관장으로 취직을 한다. 그곳에서 전 관장인 '고야스 씨'를 만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죽은 자다. 고야스의 조언을 받으며 도서관을 운영한다. 

매일 도서관에 오는 옐로 서브마린 재킷을 입은 M**을 알게 된다. M은 책을 읽으면 전부 기억해버리는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다. M은 우연히 내가 도시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도시의 지도를 그려준다. 나에게 그 도시에 가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M도 소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 건 여기서 하루하루 일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려드는 것처럼요. 지금은 그런 데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일단 이곳의 업무를 차근차근 익히십시오.그리고 이 작은 마을에 마음과 몸을 길들여주세요. 지금으로선, 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괜찮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291P 고야쓰가 '나'에게 하는 말 




시골 도서관에 관장이 된 '나'는 유령이 된 전 관장 '고야쓰 씨'에게 도서관 운영에 대한 질문을 한다. 그러자 고야쓰 씨는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일을 배우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라고 대답한다.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자에게 "미리 근심하지 말고, 오늘 할 일을 정성껏 해나가면, 그걸로 괜찮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런 작가의 인생관은 그의 모든 작품에 꽤 확실하게 드러난다. 최근에 읽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지금 읽고 있는 여행기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책을 읽은 내내 궁금했다. 현실의 '나'는 과연 소녀를 만나게 될지. (이야기 전체에서 긴장감을 끌어가는 부분이라 스포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도시는 과연 '나'와 '소녀'가 공유하는 환상인지 진짜 존재하는 것일지. 

나와 그림자 중 어떤 게 진짜인지. 

본체와 그림자는 원래 표리일체입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452P 고야쓰가 '나'에게 하는 말 


'나'와 '그림자'는 같은 존재다. 독자는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중에 하나는 도시 속에 있는 '나'가 내가 꿈꾸는 나라면, '그림자'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나라는 생각이다. 

도시를 둘러쌓은 벽은 높고, 단단하다. 동시에 마치 생명체처럼 모양과 위치를 바꿀 수 있다. '나'와 '그림자'가 탈출을 시도할 때, 눈앞에 갑자기 없던 벽이 솟아오르며 경고한다. "너희는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다." 

벽은 우리가 설정한 '한계'와 '편견'과 비슷한다. 한번 갇히면 나올 수 없다. 하지만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마음으로 간절하게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방의 작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마음으로 그렇게 원하고, 그대로 단숨에 불을 끄면 돼요.당신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습니다. 높은 벽도 당신의 날개짓을 막을 수 없습니다.당신 분신이 그 용감한 낙하를 바깥 세계에서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됩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754P 옐로 서브마린을 입은 소년이 '나'에게 하는 말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기 전 리뷰를 몇 개 읽어보았다. '난해하다'라는 평이 많았다. 망설이다가 '구매'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다. 읽고 싶었다. 마침 한국에 다녀오는 지인이 있어서 부탁했다. 한 달 후에 책을 손에 쥐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읽기를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이야기다. 현실과 다른 곳에 있는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마음대로 위치와 모양을 바꾸는 의지를 지닌 벽. 갑자기 사라져 버린 소녀. 꿈을 읽는 도서관. 본체와 그림자의 분리. 유령이 된 도서관장. 뜬금없이 나타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년. 카페 주인. 


하루키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고, 목표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무언가일 수도 있다. '나'에겐 그게 소녀였다. 나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녀를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그동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외톨이로 지냈다. 하지만 소녀의 말대로 그 도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곳에 있었다. 그 도시에서 나는 소녀와 다른 이의 꿈을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벽을 넘어 도시에서 나가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한다고. 꿈을 이뤘다고 영원히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살아있다면 계속해서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한다.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하루키의 세계관이 확실하게 담긴 책이다. 

그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어떤 식으로는 계속 변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 안에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 '순수한 마음'과 '강인한 의지'다. 그 단순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그는 현실과 비현실적이게 느껴지지만 어찌 보면 현실인 공간을 보여주고, 죽었지만 살아있는 '고야쓰 씨'를 등장시킨다. 본체와 그림자는 분리되기도 하고 일치되기도 한다. 마치 종종 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거나,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때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봐도 좋다.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마음에 벽을 세워놓을 필요 없다. 만약 추락하더라도 '미래의 나'든 '분신'이든, 누군가가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도 믿으면 된다. 

대부분은 그 '믿음'을 갖지 못해 '할 수 없다'라는 벽을 세워놓고, 그 안에 갇혀서 지낸다. 

하루키는 우리 어깨를 톡톡 치면서 말해주고 싶은 모양이다. "괜찮아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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