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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Oct 26. 2024

인간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한 명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그는 1749년에 출생하여 1827년에 생을 마감한 18세기~19세기 초의 인물이다. 이 라플라스가 주장한 ‘라플라스의 악마’로부터 영감을 얻어 탄생된 소설 하나도 얘기해 보자면, 일본의 작가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 30주년 기념작 ‘라플라스의 마녀’가 있다. 이 소설은 물리 미스터리 소설로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라플라스가 주장했다고 하는 ’라플라스의 악마‘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주장을 영감으로 하여 쓰인 ‘라플라스의 마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단, 주의할 사항으로는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글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플라스의 악마에서 ‘악마‘는 ’도깨비‘라고도 칭할 수 있으며, ‘정체 모를 누군가‘라고 칭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수학자 라플라스가 상상한 가상의 존재인데, 그의 에세이의 일부 문장을 가져와보았다.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다. “_라플라스 에세이 [대략적인 혹은 과학적인 결정론의 표현]


쉽게 얘기해서 ‘정체 모를 누군가’의 존재는 현재를 다 알고 있기에 이를 통해 과거와 미래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라플라스는 우선 ‘누군가’가 진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존재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 존재가 전 우주의 모든 원자들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다면, 그러한 물리량으로부터 고전 역학의 법칙들을 활용하여 원자들의 과거나 미래의 물리 값 또한도 알아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플라스의 주장은 당시엔 굉장히 획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주장이 사실이라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예언’의 영역에 인간도 발을 담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라면 인간도 예언 즉 과거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뉴턴의 법칙 같은 고전 역학에 해당하는 법칙들을 통해 계산을 할 수 있다면, 어떠한 물체의(그 물체는 사물일 수도 인간이 되기도 우주가 되기도 한다.) 현재의 물리량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값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학적인 값들은 현실의 물체의 움직임으로 치환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 처음에는 수학적인 ‘값’으로 인식했어도 그 의미를 따져보면 물체의 움직임, 나아가 세상의 흐름과 형태, 우주의 과거와 미래까지 알아내게 되는 것이므로 당시 라플라스의 주장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거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라플라스의 마녀’에서는 앞서 얘기한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주인공 ‘우하라 마도카’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줄거리를 얘기하자면, 마도카는 엄마와 같이 외할아버지를 마중 나가던 중 토네이도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마주친다. 건물이 무너지고 바람에 떠밀려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엄마 미나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마도카의 아버지는 뇌과학 분야의 유명한 의사인지라 중요한 일정이 있어 함께 하지 못했고, 재난을 피하게 된다.


 8년의 시간이 흐르고, 마도카는 다케오의 경호를 받게 되는데 다케오는 절대로 마도카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계약을 맺는다. 마도카가 날씨를 예측하는 등의 능력을 보였을 때, 다케오는 계약에 따라 신경 쓰지 않고 경호를 지속한다. 이후, 미스터리 한 사망 사건이 발생하는데,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서 담당 형사는 자연과학 교수 아오에에게 자문을 요청한다. 탐문하던 아오에는 웹 검색을 통해 같은 사고를 겪은 사이세이라는 영화감독을 알게 된다. 사이세이는 사고를 통해 아내와 딸을 잃었고, 아들 겐토만은 의식 불명 식물인간이 되는 아픔을 겪었다. 사이세이는 마도카의 아버지 우하라를 찾아갔고, 수술 제안을 받게 된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겐토는 기억 상실증에 걸려 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들은 담당 형사 나카오카는 우하라를 찾아가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한편,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따로 접촉할 수 있게 되고, 마도카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 같은 이상하고도 신기한 능력을 직접 보게 된다.


 알고 보니, 겐토는 우하라 박사로부터 수술을 받은 뒤, 기적적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신기한 능력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신경 회로를 형성하는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즉각적으로 분석하여 그다음 순간의 미래를 순식간에 계산해 낼 수 있는 ‘라플라스의 악마’와도 같은 능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상부로 보고되었고, 그다음 실험체가 필요한 상황에서 마도카가 그 실험체가 되었고, 마도카 역시도 신비한 능력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마도카는 겐토와 친구여서 비밀 실험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는데, 자신과 엄마가 겪은 사고를 다른 누군가가 또다시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실험에 자원하게 되었다. 아버지인 우하라 젠타로는 이 실험에 대해 매우 반대했는데, 마도카의 의지에 따라 수술을 하게 된다. 일주일 간 의식이 없던 마도카는 다행히 의식을 찾게 되고, 마도카도 겐토처럼 능력을 얻어 ‘라플라스의 마녀’가 된다.


 그러던 중 겐토가 사라지고, 마도카가 겐토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기관에서는 경호원 다케오를 붙여준 것이었다. 마도카는 겐토가 어떤 일을 할지 알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영화 촬영지인 한 폐허라는 장소에서 결국 겐토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위의 연쇄 사고는 연쇄 살인 사건이었고, 살해범은 겐토였다. 살해의 이유는 아버지 사이세이에 대한 복수를 위한 수단이었다.


 사이세이 감독은 사고를 당해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겪은 게 아니었고, 사이세이 감독 본인이 사고로 위장해 아내와 딸을 살해하고, 아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자작극을 펼친 것이었다. 하나 방심한 게 있다면, 의식은 살아있으나 몸만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간인 겐토에게 사건의 진상을 말해버린 것. 겐토는 진실을 안다는 걸 사이세이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기억력 상실이라는 연기를 한 것이었다. 겐토는 몸의 회복 후, 사이세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라졌던 것이었다. 폐허라는 장소는 다운 버스트라는 자연재해가 닥칠 곳으로 예상되는 장소였고, 겐토와 사이세이는 대치하고 있었다. 마도카 덕에 이 둘은 재해로부터 생존했지만, 겐토는 사라졌고 사이세이는 자살하면서 소설이 끝이 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 나오는 다케오와 마도카의 대화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보인다.


“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미래는 어떻냐”라는 다케오의 질문에 마도카는 답한다. “모르는 편이 나아요.”


 마도카의 마지막 대사는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때로는 불안해서 미래를 알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미래는 모르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거다. 물론 사람의 심리로는 미래를 괜히 알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모르는 게 삶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계단을 하나씩 겪어나감을 통해 계단마다의 재미 또는 아픔을 느끼고, 그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은 굉장히 흥미롭고 신기한 일이지만, 우리의 세상에서는 그다지 필요한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다.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최소한 우리의 노력의 끝이 무엇인지 알고 시작한다는 건데 그런 건 좋기만 하기보다는 좀 슬플 것도 같다. 미리 알고 있다면 굳이 시작하지 않게 되고, 일부러라도 나아갈 의지를 상실할 수도 있으니까. 앞의 일을 안다고 생각하고선 지레 겁먹고 포기하듯이. 차라리 생일을 좀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물 상자를 열어보는 게 더 재밌지 않은가.


 라플라스의 주장은 이후에 현대 물리학을 통해 사실이 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라플라스의 사고실험은 결정론에 대한 사실이 아닌 추정만 할 뿐이며, 물체는 실제로는 확률적으로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한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이를 증명해 준다. 결국, 자연에는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측정에서의 한계가 존재하고, 그것이 자연의 본질인 것이다. 이로써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고전 물리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여전히 미래를 알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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