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코로나로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후 부모님 참여 행사가 없다가 거의 처음으로 모든 부모님들이 함께 모인 자리였다.
남편은 간단한 자기소개서 등의 특기란에 항상 달리기를 써넣을 정도로 달리기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옆에서 보면서 특기가 달리기라니 상당히 헝그리 하다 생각했지만 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운동회를 하면 아빠로서달리기에 참여할 의지를 매우 강력히 표현해 왔던지라 이번행사가 공지되었을 때 나 역시 고민 없이 남편을 위해 신청하기로 했다.
부모님의 이어달리기 참여신청은 공지가올라온 당일 저녁 9시부터 온라인으로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학기 중 방과 후수업 신청도 아니고 한낱 부모님 달리기 신청 따위가 치열할 것을 정말이지 1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예의상 8시 59분에 알람을 맞춰뒀고 9시 정각 별생각 없이 양치하던 중 칫솔을 입에 물고 신청버튼을 눌렀다. 모집인원은 청백남녀 각각 6명씩 총 24명이었다.
청팀, 백팀,남자, 여자 옵션을 다시 재확인하고 클릭.
그리고 바로 팝업이떴다.
-백팀 남자 신청완료 되었습니다. (6번째)-
오 마이갓.6번째라니 0.1초만 늦었더라도 신청 못할뻔했다. 갑자기 뒤통수아래로털들이 바짝 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다행히 신청에는 성공했고 운동회날이 되기 전까지 남편은 계주를 위해 출근길을 걸어갔다는 둥 테니스를 목숨 걸고 첬다는둥 딸의 운동회인지 본인의 육상대회인지 분간이 어려운 며칠을 보내는듯했다.
운동회날이 되었다. 남편은 학교도착 전 주차할 동안 스벅에서 모닝커피와 단백질이 가득한 샌드위치를 주문해 달라 했다. 운동장 뒤편에 자리를 잡고앞쪽을 보니 꼬꼬마1학년들이 꼬물꼬물 개인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그걸 보는 그의 손에 땀이 흥건했다.
"남이 경기하는 걸 보니까 더긴장되네"
"설마 저기 1학년아가들 뛰고 있는거 말하는 거니..?"
"Palpitation이 너무 심한데. 여기 좀 만져봐"
정말이지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의 긴장감이 나에게까지 전달되어 왔다.
딸이 운동장 앞에서 콩주머니를 던지고 6인 7각 달리기를 해도남편의 눈은 공허했고 머릿속은 오로지 잠시 후 있을 본인의 계주생각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 가방에 남편 양말이 들어있었다. 집에서 나설 때 양말이 어쩌고 하면서 넣는 것 같았는데 이게 뭐냐 하니 이따 달릴 때 신발을 벗고 달릴 거라서 여분을 챙긴 거란다.
"읭??? 왜?"
"난 원래 신발 벗고 달려."
"그러니까 왜."
"그게 제일 가벼워."
"굳이?? 딸 운동회에서?"
"그게 제일 빠르다니까? 너무 빨라서 몸을 주체 못 할 정도? 맨발은 신이 주신최고의 신발이야."
... 이아저씨는 지금 뭐라는 걸까.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헝그리러너가 따로 없다. 왜 저렇게 또 진지하지.
"내 소원은 내가 마지막주자로 달려서 역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소원? 소원씩이나야? 미치겠구만 정말."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마침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나 결론적으론 남편은 마지막주자가 되지못했고 역전의 주인공도 되지못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본인이 육상출신이라며 마지막주자를 강력히 자처한 다른 아버님이 있었다고 했다.
다들 참.. 뭐랄까. 남자들은 신기했다.
여튼 남녀가 번갈아가며 바통을 받는 이어달리기인데 앞서 달린 백팀 어머님, 아버님들이 이미 청팀과 너무나 격차가 많이 벌어지는 바람에 이미 운동장 반바퀴이상이 차이가 나 조금은 시시한 타임에 남편이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고 사실 슈퍼맨이 아니고서야 역전은 불가능한 거리였다.
그렇게 아쉽게 운동회는 마무리되었다. 맨발의 기봉이는 아무도 주목하지 못한 채.
기봉아저씨가내 남편이 된 건 올해로 10년 차인데 늘 옆에서 느끼지만 생각지 못한 포인트에서 정말 열심이고 너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전우리가 같은 학교에서 연애할 때도 그는 교내 이어달리기에서 맨발로 뛰고 있었다. 당시 남편은 마지막 주자였는데 같은 팀 선수가 바로 앞에서 아주 제대로 넘어지는 바람에 한 바퀴 가까이 벌어져 심지어 남편이 달리기 시작했을때 상대편선수는 결승선을 도착해버렸다.이미 시시 해저 버린 경기에서 기봉이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기봉이는 마치 상대선수가 바로 옆에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일생일대 기억될 경기인 것마냥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했다. 맨발로.
보통은 이미 결과가 결정된 이어달리기경주에서 마지막주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마치 조깅하듯 털털 뛰어 들어가게 마련인데 말이다.
그가 달리기에 쏟는 열정의 오억 분의 일 만큼만이라도 육아에 일조한다면 정말 훌륭한 아버지가 될 텐데.라고 아주 잠시 생각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