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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화백 Sep 16. 2023

맥시멀리스트의 제주 입도기

맥시멀리스트는 학창 시절부터 문구점이나 팬시점 드나드는걸 너무도 좋아했다. 특히 대형 화방을 한 바퀴, 두 바퀴 돌다 보면 새로운 것들이 너무도 많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느낌에 두근댔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끔 친구들, 특히 남자친구들은 종종 별별 아기자기하고 세상 쓸데없이 잡다한 물건들을 다 가지고 있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첫 번째 어린이가 매번 문구점과 다이소에 들를 때마다 인형을 집어 들고 버려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포카에 열광하는 걸 보며 어쩜 저렇게 쓸데없지 싶은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린 시절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내 용돈 안에서 모든 걸 해결했지 이 어린이처럼 막무가내로 사서 내놓으라 하진 않았다.


애니웨이.

제주에 온 지도 이제 6주가 지났다.


우리의 상황은 남편이 서울에 직장으로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니 모든 짐을 뺄 수가 없어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구와 가전은 모두 서울에 남겨두었다. 새로운 제주집에서 주로 거주하게 될 인원 셋이고 서울집의 거주자는 나가 된다. 런데 한 집에 거주하던 인원이 4명에서 3명이 되고 (심지어 주말엔 다시 4명)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제주집이 서울보다 그 크기가 작아지는 것은 어느 맥시멀리스트머릿속 옵션에 처음부터 없었고 안될 일이었다.


맥시멀리스트는 일단 집이 정해지고 그 안을 채워 넣어야 했다. 물론 앞으로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첫째 어린이가 학교에서 마주하는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거부하고 서울로 돌아가자며 단식투쟁을 하거나 냄새에 예민한 둘째 어린이가 소똥냄새가 싫다며 서울로 돌아가자고 데굴데굴 구르며 울고불고할 수도 있으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집을 채워야 했다.

분명 처음 계획은 그러했다.


일단 처음엔 동네 커뮤니티에서 이사 나가는 사람들의 중고 가구와 가전들을 일괄로 받아볼까 하여 네이버카페를 기웃기웃해 보았다. 사실 일괄로 저렴하게 내놓는 사람들은 적잖이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의 일괄 물품 중에는 꼭 하나씩만 마음에 들었다. 하나는 맘에 드는데 나머지들은 정말이지 내 집에 결코 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라 일단 그 옵션은 바로 접고 마음에 드는 물건 하나씩 중고거래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동이 문제였다. 가구당 용달을 부르고 가전은 업체전용 이전신청을 하자니 생각만 해도 너무나 귀찮고 돈은 돈대로 더 들어 보였다. 하루에 날을 잡아 이집저집 돌면 용달기사님 가격은 절약할 수 있으나 일정을 맞추다간 스트레스로 머릿털이 다 빠질 것 같았다. 게다가 정식입도일 3일 전까지 근무를 해야 했어서 복잡한 스케줄관리는 딱 질색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냥 언제든 되팔 수 있는 저렴한 새 제품들로 채우는 게 훨씬 경제적이겠다는 결론에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온 가족의 입도예정일 몇 주 전 남편과 하이마트에 방문했다.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이고 상황에 맞게 매우 절약을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들어서자마자 말했다.

"전시제품이거나 지금 행사 중인 것들로 냉장고, 세탁기, 건조기 보여주세요"

이것저것 고민할 것도 없이 그날 직접 볼 수 있는 조건에 부합하는 모델들은 각 1개씩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제품들은 디자인도 괜찮았고 특별히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들이었다. 나 또한 결정이 심플해지니 좋았다. 나는 세상 쿨한 아랍리치 마냥 하이마트에 들어선 지 10분이 채 안되어 모두 결제하고 배송일을 지정받았다.  


그리고는 뒤늦게 서울에 돌아와 내가 계약한 물건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그것들은 물론 디자인이 번쩍번쩍 난리 나거나 현시대 최고를 자랑하는 다양한 옵션과 기능에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만한 것들은 아니지만 일단 모두가 신제품이었다. 진정 우리가 제주를 1년 뒤 바로 떠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합리적이고 절약의 아이콘 어머니라면 왠더 저렴한 구형 모델을 구입했어야 마땅할 것만 같았다. 예를 들면 굳이 4 도어냉장고보단 심플 2 도어 소형냉장고를 선택한다던지. 굳이 세탁기 건조기가 위아래 통합으로 붙어있는 신제품을 결정하기에 앞서 통돌이 세탁기만 단출하게 구입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했나 싶어 잠시간 반성의 시간을 갖게 했다. 심지어 나는 (타의에 의한) 백수가 예정되어 있는 사람인데..라는 생각까지 미치니 마치 내가 엄청난 사치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저렴한 구형모델은 마트 안에 전시를 해둘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내 맥시멀리스트는 외로운 타지에서 코딱지만 한 아주가 통돌이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빼며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씨름하고 결국 발받침대를 다이소에서 구매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상상 속의 코딱지 주미 성애가 잔뜩 낀 작은 냉장고를 여닫으며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는 스크랩퍼로 두툼한 성애를 벅벅 긁어내고 있다. 

 이런. 너무도 우울해서 눈물이 앞을 가릴 것만 같다.


남편도 없이 제주에서 (타의에 의한) 백수가 되어 빨래하고 냉장고 열다 우울증에 걸려 병원에 들락거리느니 지금 돈을 조금 더 쓰는 게 훨씬 장기적인 차원에서 절약할 수 있으며 또한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신체적 건강에도 나을 것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했다.


그다음은 가구차례. 나는 사치를 모르는 합리적인 소비자이므로 제주로의 배송이 가능한 합리적 가격의 가구 업체로 선택 옵션이 추려졌다. 마침 그날이 해당 브랜드의 브랜드데이이며 저녁에 방송이 예정되어 있다는 네이버 광고가 떴다. 맥시멀리스트는 더욱 합리적 소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저녁이 되기를 기다려 소파와 침대 2개, 책장, 책상을 담았다. 선착순으로 주는 커피 이벤트에도 참여했고 특정가격이상 구매 시 주는 백화점 상품권도 신청했다. 브랜드데이에 구매하면 적립금도 평소보다 훨씬 더 크다며 쇼호스트가 연신 나의 구매에 힘을 실어주었다.


 식탁은 제주지역 내 가구점에서 튼튼해 보이는 세라믹상판을 보유한 6인식탁으로 결정했다. 우리 집에서의 식탁은 비단 식사하는 용도 외에도 두 어린이들의 숙제와 책 읽기 등의 역할을 수행할 공간이기도 하므로 반드시 크기가 그 역할들을 수행하기에 충분해야 했다.


또 제주에서는 온전히 청소가 내 몫이므로 매일 온 집을 쓸고 닦다 어느새 지는 해를 맞이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르 흐르는 일상을 막기 위해서는 나의 벗이 되어줄 로청이모님을 새로 모셔야 했다.


커피머신은 남편은 거의 이용하지 않아서 서울에서 가져갈까 하다가 신혼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니 이미 1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리프레쉬가 마땅하다며 새 제품으로 구비하였다.(???)


그리고 나는 거실에 티비를 두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크기의 티비는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또 없으면 헛헛한 게 티비이다보니(?) 대신 집안 어디든 이동이 가능한 소형제품으로 선택했다.  

'얼마 전 지인은 이사하며 800만 원짜리 티비를 샀다던데.. 와. 나 정말 절약했!' 라며 합리적 소비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칭찬했다.


이래저래 모두 각자의 응당 마땅하고 충분히 합당한 이유들로 물건들이 구입되어 모여졌다. 아니 모여지고 있다.  


맥시멀리스트는 오늘도 식탁에서 두 어린이들이 숙제하는 동안 건너편에 마주 앉아 며칠 전 구입한 투명독서대를 펼쳐 만족스럽게 책을 올려놓았다. 활자를 읽어 내려간 지 2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아이들이 앉은 의자가 움직이며 드드득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순간 생각들이 뇌리를 번개처럼 빠르게 스친다.

'의자 소리 없애는 거 어디서 팔았더라.. 깔끔 대장이었나...'

바로 쿠팡을 열어 '이게 낫나 저게 낫나. 지난번엔 이걸 써봤으니 이번엔 요걸 써볼까. 어, 이것도 필요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큰일 날뻔했군..' 

바쁘게 맥시멀리스트의 소임을 마친다. 그렇게 책을 3분 이상 읽어내지 못하고 휴대폰 속 장바구니만 가득 채운채 저녁시간이 마무리되었다.


어째 (타의에 의한) 백수가 되고 보니 필요한 물건들은 더 눈에 쏙쏙 잘 들어오고 검색해서 찾아낼 시간도 충분해졌다.

그리하여 맥시멀리스트는 이전보다도 더욱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더 많이) 하는 중이다.


나는 자타공인 맥시멀리스트이지만 분명한 건 사치스러운 맥시멀리스트는 아니라며 쿠팡스크롤을 빠르게 올다.


구관이 명관이라며 통돌이 예찬론자들이 존재하기에 수십년간 아직도 그 인기를 이어가고있는 그 통돌이. 다만 나같은 코딱지들은 다된 빨래를 꺼내다 세탁기 안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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