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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설날은 부모님과 부모님과 함께 보내지 않게 됐다.
원래는 올해도 내려갈 생각이었다. 올해는 연휴 기간이 길었지만, 그렇다고 버스 예매가 쉬운 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업무는 금요일 점심이 끝났지만 서울에서 순천 가는 버스표는 금요일과 토요일 모두 매진되어 광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순천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만류로 올해는 나와 동생 모두 내려가지 않았다.
나와 동생 이외에도 올해는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설날을 맞이했다. 나와 동생은 서울에서, 부모님은 사천 백천사로 가고, 창원 사촌여동생은 부산 사는 남편댁과 설날을 보낸다. 그나마 언양 삼촌이 순천으로 내려와 부모님과 같이 여기저기 놀러 갔다고 한다.
지난해까지 가장 큰 어르신이었던 할머니도 올해는 부모님 댁에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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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의 절반 이상을 요양병원에서 지냈던 헐머니는 결국 설날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우리 가족은 연말에 할머니와 사실상 마지막 인사를 드렸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각오한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말로 태어났을 떼부터 봐 왔던 사람 중 하나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술 한 잔 했다. 작년 설날만 해도 세상 정정한 줄 알았던 사람이 그렇게 떠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보다 더 마음을 좀먹는 건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혹은 경멸감) 같은 것이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나는 할머니를 잘 알지 못했다. 할머니가 살아왔던 나날은 제3자 입장에서 여러 모로 복잡한 삶이었다. 내 부모님에게는 조금 너무해 보이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는 할머니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무관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영원히 세상 뜬다고 하니 즙이나 짜고 있다고? 나는 도대체 어떤 X끼인거야? 이런 감정이 뇌와 심장을 갉아먹는 동안 나와 동생은 창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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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도착한 장례식장은 창원중앙역 부근 대형병원에 있었다. 사촌동생의 안내 아래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부모님과 창원 식구들, 언양 식구들이 할머니 영정 곁에 모여 있었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나눠준 상복을 입고 모인 김에 맥주 한 잔 한 다음 새벽 2시쯤에 다들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아침 9시경에 입관식이 있었다. 할머니는 삼베옷을 입은 채 꽃들에 둘러싸여 관에 누워 있었다. 이미 연말에 한 번 봤긴 했지만 작년 이맘때보다 훨씬 말라 있었던 건 분명했다. 관을 닫고 온 가족이 손을 올릴 무렵 어머니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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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장례식장을 찾아 많은 이들이 왔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간단히 인사드리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냐면서 충격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나 작은아버지, 삼촌 직장 동료도 있었고 울릉도 사람들도 있었다. 고딩 때 이후로 만난 적 없다가 장례식장에서야 다시 뵌 아버지 친구는 지금 중소기업 사장님이라더라.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거제도 식구들이었다. 중학생 때 외할아버지 장례식이 있었다. 그때 아버님이랑 거제도 식구랑 술 마시고 대판 싸운 뒤 우리 가족과 거제도 식구는 얼굴 맞댈 일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났다니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거제도 이모는 할머니를 향해 절을 올린 후 불경을 읋으며 기도를 올렸다. 정확히 어떤 불경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떠나가는 사람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20분 정도가 지난 뒤 거제도 식구들과 아버님, 어버님은 맞절을 하고 함께 앉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떠날 때 헤어졌던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가 떠날 때 화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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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영 좋지 않은 고인드립을 치면서 "장례식장에 육개장 맛있게 만들어와라 ㅋㅋㅋ"라는 애들이 있다. 이번 장례식에 육개장은 없었다. 대신 편육에 시래깃국이 나왔다. 여러 음식점에서 일하다 요즘에는 빵집에서 일하는 사촌동생에 따르면 창원에선 원래 장례식 때 시래깃국이 나온다고 한다.
아무튼 편육에 시래깃국 하고 그 외 이런저런 안주에 소주 한 잔을 하면서 여러 식구와 친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거제도 식구들은 장례식장에 특히 더 오래 있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한때 대판 싸웠던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동안의 오해를 풀었음은 분명해 보였다.
나 역시도 친척들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리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밤 11시가 되어 다들 집에 돌아갈 무렵에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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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는 발인이 있었다. 장례식장을 떠나기 전에 다들 절을 올리고 나를 비롯한 할머니 손자들이 관을 들어 버스로 옮겼다. 그 후 상복공원에서 화장에 들어갔다. 1~2시간 정도 지나니 할머니였던 것들이 모여 항아리에 담겼다.
가족들은 유골이 담긴 항아리, 영정사진과 함께 사천 백천사로 향했다. 나는 영정사진을 들고 가야 했기에 맨 앞에서 영정사진, 항아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봤던 영정사진 속 할머니의 모습은... 솔직히 많이 어색했다.
부모님 말로는 전에도 미리 영정사진을 찍자고 할머니께 건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사코 찍기를 거부하다 작년에는 찍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예전에 촬영했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께서 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다. 굳이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기 싫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살았다는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기 싫었던 걸까. 혹은 그냥 자기 사진 찍는 게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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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절에 도착하고, 가족들은 스님의 종소리를 따라 봉안당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백천사 내 봉안당에 모셔지고, 스님이 장례 절차를 이어갔다. 다들 절 안에서 합장하며 기도하고 나니 장례식이 모두 끝났다.
일가족은 모두 스님에게 이번 설에는 장례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49제는 어떻게 되는지 여쭤봤다. 스님 말로는 할머니가 모두 전에 말해놔서 절에서 모두 알아서 해준다고 한다. 나중에 그리우면 사천 놀러 올 때 절 한번 찾아주면 그만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가족들 모두는 모르고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은 물론이고 곁에 있던 창원 식구들도 그냥 할머니가 생전에 아무 말하던 것 정도로 여기곤 했었다. 그걸 할머니가 여태 자세히 알려주지 않다 이제 세상 다 떠난 뒤에야 알 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정말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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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장례식이 끝나고 남은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올해 은퇴하신면 어머니는 울산으로 돌아가서 고향 공기 맛보고 싶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의외로 순천 생활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지만. 창원 식구들은 할머니 없는 집에서 계속 살 것이고, 이제 막 복학하는 막내 사촌은... 뭐 알아서 잘하겠지.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할머니는 100%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할머니가 완전히 세상을 떠난 지금도 변함없다. 그럼에도 80년 이상을 악깡버하며 버텼던 사람이 갑자기 무너져 버린 것은 분명 무겁고 충격적인 일이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 생각보다 남은 사람들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남은 식구들이 굳이 힘들여 자기네 제사를 치르지 않아도 되도록 적지 않은 돈을 들인 것 같다. 다시 만난 거제도 이모에 따르면 나를 비롯한 손자 손녀들에게도 각별한 마음이 강했다고 한다. 생전에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거의 어려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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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화에서 본 글이 생각난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기념물은 바로 무덤이라고. 먼 옛날 인류는 무덤을 통해 지금은 없지만 있던 것, 지금은 경험하지 않지만 언젠가 경험하게 될 것을 떠올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류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장례식도 그럴 것이다. 나와 남은 식구들은 할머니의 장례식을 통해 지금은 없는 할머니의 기억을 나누고 할머니를 추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몇 년째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다시 보는 것은 보너스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은 이제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할머니가 더 이상 자식, 손주들에게 세배를 받고 덕담을 주고받는 일이 없는, 모두들 집에서 쉬면서 할머니를 생각한 올해 설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