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끝나고 세계화 시대가 열린 90년대는 PC(Personal Computer)의 시대라 해도 될 것 같다. 연구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컴퓨터가 데스크톱 PC라는 폼팩터 아래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CPU가 있었다. 인텔이 펜티엄 프로세서로 PC 시장에서 절대강자로 자리 잡은 가운데, AMD도 자체 개발한 CPU를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CPU 전쟁의 구도는 이때 잡혔다고 볼 수 있다.
펜티엄 이전만 해도 인텔 프로세서는 제품명에서 숫자를 내세웠다. 1985년 80386 프로세서를, 1989년에는 80486 프로세서를 선보인 인텔은 1993년에도 80586(혹은 i586)이라는 이름의 프로세서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오늘날 세대차이를 논할 때 툭하면 등장하는 ‘386’, ‘486’, ‘586’은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생겼다. 앞서 1편에서 언급된 AMD와의 분쟁에서 인텔이 패배한 것이다. 80386 세컨드 소싱과 관련된 인텔과 AMD의 분쟁은 오랜 시간 끝에 인텔이 80386, 80486 등의 숫자를 상표로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로 끝난다.
이에 인텔은 ‘펜티엄’이라는 브랜드로 새 프로세서를 출시했다. ‘pent-’는 그리스어로 숫자 5를 뜻하는데, 여기에 -ium을 붙여 펜티엄이라는 브랜드명이 탄생했다. 아무래도 기존의 숫자보다는 확실히 외우기 쉬워 보인다.
한 발 더 나가 인텔은 펜티엄 프로세서를 탑재한 PC에 그 유명한 ‘Intel Inside’ 로고를 붙이게 해 펜티엄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다. 이전만 해도 숫자만 몰랐던 공돌이 이미지가 강했던 인텔이 세련된 브랜드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법정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라니 뭔가 아이러니하다.
물론 단순히 브랜드명이 섹시하다는 이유로 인텔 펜티엄 프로세서가 PC 시장을 지배한 건 아니다. 그만큼 성능도 섹시했기 때문이다. 처음 출시된 펜티엄 프로세서는 60MHz, 66MHz 두 가지 버전으로 나왔는데 이 정도만 해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스피드였다.
구조에서도 혁신이 많았다. 먼저 그동안의 프로세서와 달리 듀얼 파이프라인 구조를 구현해 한 클럭당 다수의 명령어를 처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64비트 외부 버스로 데이터를 더 빠르게 전송할 수 있게 되었으며, MMX 명령어가 후기 모델이 추가되어 PC에서도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펜티엄 아키텍처로 만들어진 프로세서는 기존의 486 아키텍처 대비 클럭 사이클당 연산속도가 2배 가까이 빨라졌다. 심지어는 100MHz 486 프로세서보다 60MHz 펜티엄 프로세서가 더 빠른 처리 속도를 보여줬을 정도다.
인텔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995년 펜티엄 프로 프로세서를 발표했다. 당시는 인텔의 오랜 친구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95로 32bit 운영체제의 서막을 알리던 시기였는데, 인텔도 이에 발맞춰 32bit 명령어 처리에 최적화된 펜티엄 프로를 출격시켰다.
사실 인텔 펜티엄 프로가 성공작이라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가격대가 당시로서는 너무 높은데 유저의 기대만큼 성능을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프로세서 덕분에 인텔은 32bit 시대에서 먼저 치고 나갈 수 있었다.
이후 인텔은 1997년 펜티엄 II를, 1999년에는 펜티엄 III를 선보이며 윈도우 OS와 함께 PC 시장의 절대강자가 되었다. 기술 혁신은 계속 이어져서 펜티엄 III 코퍼마인 프로세서에서는 21,000,000개의 트랜지스터를 칩 하나에 구현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때만 해도 인텔의 라이벌은 없을 것만 같았다.
앞서 1편에서 이야기했듯이 AMD는 인텔과 연관이 많았다. 조금 가혹하게 말하자면 인텔의 ‘카피캣’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1986년 인텔이 80386 라이선스를 취소하고 관련 기술 공개를 거부한 이후 AMD는 인텔과 싸우면서 자신만의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등장한 프로세서가 바로 1996년 공개한 AMD K5 프로세서다. AMD K5는 독자 설계한 소켓 호환 x86 프로세서로, K는 슈퍼맨 만화에서 나오는 크립토나이트(Krptonite)에서 따왔다. 오직 인간의 힘으로 신과 같은 슈퍼맨에 맞서는 렉스 루터처럼, 절대강자 인텔의 라이벌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AMD에겐 렉스 루터급의 재력은 없었던 것 같지만).
AMD K5의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기술이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펜티엄보다는 펜티엄 프로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실성능은 펜티엄 프로보다는 펜티엄과 경쟁할만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제 막 자기 힘으로 프로세서를 만들던 시절이었으니…
이후 AMD는 1997년 K5의 후속작인 K6 프로세서를 선보였다. 인텔, AMD 이외에도 실리콘밸리에는 넥스젠(NexGen)이라는 x86 프로세서 개발 회사가 하나 더 있었는데, 이 기업을 AMD가 사들인 다음, 넥스젠이 만들던 Nx586의 설계를 이어나가 만든 것이 K6다.
K6는 RISC86 코어로 x86의 복잡한 명령을 RISC86의 더 작은 작업으로 해독해 정수 연산 성능을 향상시켰다. 이를 통해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인텔 펜티엄 II와 겨뤄볼 만한 수준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가격이 상당히 착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AMD는 동급 인텔 프로세서보다 25% 저렴한 가격에 칩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하며 공격적인 가격 정책을 보여줬다. 펜티엄 II 프로세서가 가격을 인하하자 즉시 K6 가격을 최고 22% 인하할 정도였으니까. K6를 통해 AMD는 PC 시장에 자리 잡는 데 성공하고, 인텔의 진지한 라이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참고]
펜티엄 - 해시넷 위키 http://wiki.hash.kr/index.php/%ED%8E%9C%ED%8B%B0%EC%97%84
[반알못을 부탁해] CPU의 상징과 같은 인텔의 역사, 배유미, 바이라인네트워크, 2020-12-16
Microprocessor History – AMD K5, 퀘이사존, 2019-05-01
AMD는 전설이다. 한 눈에 보는 AMD CPU의 역사와 세대별 특징, 다나와, 2020-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