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0일은 유달리 이런저런 일이 많은 때였다. 이제 슬슬 매거진 마감에 힘도 써야 하고, 지스타 취재 때문에 KTX도 예약해야 했다. 개막 1주일 전인데 간단히 기사도 남겨야겠지. 그 와중에 수능도 D-7이라 그에 맞춰 기획했던 기사도 하나 올렸다.
오후에는 개인 일이 있었다. 이전에 관심 있어하던 곳에서 면접 제의가 있어 슬쩍 갔다 왔다.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면접은 성공적이었다. 중간에 간단히 병원에 어제 검사 결과가 어찌 된 건지도 물어봤다. 아무튼 검사 결과는 정상이라 한다. 뭐, 그래. 이상한 바이러스가 튀어나온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좋다면 좋고 적어도 그럭저럭이라 할만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퇴근하기 전 인스타그램을 보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Thank You, Ruler라니.
01
필자는 리그 오브 레전드(간단하게 ‘롤’이라고 부르자) 대회를 처음부터 깊이 있게 본 건 아니었다. 중학교 때 스타리그를 챙겨보다가 하필 고3 때부터 다시 스타리그, 프로리그를 보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와서는 송병구와 허영무, 삼성전자 칸을 누구보다… 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좋아했다.
한창 사람들이 이영호냐 이제동이냐를 놓고 싸울 무렵, 그 저그가 승부조작을 저질렀고 그 사이 스타크래프트 2가 국내에 상륙했다. 당시 스타팬들은 스1 리그에 그대로 납은 쪽이 많았고, 새로운 스타크래프트 2 리그인 GSL에 빠져든 이들은 소수였다. 나는 후자였고… 솔직히 지켜보는 게 마냥 쉽진 않았다.
도무지 스2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e스포츠 구단들은 하나둘 롤팀을 창단하기 시작했다. 삼성도 분위기에 맞춰 삼성 블루와 삼성 화이트를 창단했고, 삼성 칸 팬이었던 필자는 두 팀을 조금씩 챙겨보기 시작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삼성 화이트와 스타 혼 로열 클럽이 결승을 치를 때는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그 경기에서 삼성 화이트는 세체팀이 되었고… 삼성 블루와 삼성 화이트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02
다시 삼성 롤 팀을 주목하게 된 때는 2016년이었다. 그전부터 삼성은 하나둘 스포츠 지원을 중단해왔고, 덕분에 세계 최강의 롤팀 2개가 터지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이름만은 남기자고 해서 사정사정해서 만들어진 게 2기 삼성 갤럭시였다. 물론 성적은 변변치 않았고, 첫 시즌에는 강등권까지 떨어질 정도였다.
다음 해, 삼성 갤럭시는 CJ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앰비션’을 영입하면서 조금 그럴싸할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서머 시즌에는 ‘벙’이라는 신인을 영입한 뒤 ID를 ‘룰러’로 바꾸고, 원래 원딜이었던 ‘코어장전’은 서포터로 전향했다.
그때부터 삼성은 재미있는 팀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상) 재창단 이후 정규시즌에선 도저히 못 이기던 KT를 꺾고 롤드컵으로 가더니, LA에서는 결승에서 역스윕을 넘보기에 이르렀다. 5세트에서 막판 집중력이 조금만 살아 있었으면 사상 최초로 역스윕으로 우승했을 것이다.
다음 해에도 삼성은 선발전에서 KT를 꺾고 중국으로 향했다. 그 당시 메타는 향로 아이템으로 원딜의 캐리력을 얼마나 끌어올리느냐가 최우선 과제였고, 그런 천하제일 원딜 대회에서 결국에는 룰러가 최고였다. 결숭에서 룰러는, 삼성은 SKT를 3:0으로 누르고 삼성의 이름으로 두 번째 소환사의 컵을 들게 되었다.
물론 아쉬운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롤드컵 우승 시즌에도 삼성 갤럭시는 LCK 우승컵을 들지 못했다. 스프링 때는 크라운이 MVP를 차지했지만, 플옵에서 KT에 무너졌고, 서머에서는 더 아쉬운 성적 속에 SKT에 꺾였다. 그래도 어떤가. 롤드컵의 주인은 삼성인데.
03
하지만 삼성그룹이 프로게임단을 모바일 게임으로 돈 좀 만진 케빈 추에게 매각하면서 삼성 갤럭시라는 이름은 e스포츠에서 사라졌다. 롤드컵 우승 멤버들은 삼성 대신 KSV로, 다시 KSV에서 젠지에서 뛰게 되었고, 이번에도 선발전을 뚫고 롤드컵에 진출했지만… 그 이후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틸라가 너무 쎄요 아아아악 바이탈리티 죄송해요!
다음 해에는 LCK 플옵에도, 롤드컵 선발전에도 가지 못했다. 뇌신 감독이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눈여겨봤던 피넛을 야심 차게 데려왔지만, 솔직히 그 당시는 폼이 썩 좋지 못했다. 물론 그만큼 상체가 흔들렸던 점도 컸다. 솔직히 서머 때 풀타임으로 평타 치는 미드만 있었어도 플옵 막차까지는 가능했을 텐데…
그래도 다행인 점은 룰러가 계속 상수 그 자체였던 점이었다. 팀이 힘든 와중에 펜타킬도 스틸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룰러는 언제나 팀의 중심이었다. 드림팀 SKT와 그리핀과 맞붙을 때도 바텀 싸움에서 반반을 못 갈 것이라는 불안은 없었다.
04
선수와 팀, 팬들에게 힘든 시즌이 지나고 젠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직전 시즌 KT에서 고통받던 비디디와 19시즌 한체정 클리드에 킹존에서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던 라스칼이 새로운 탑이 되었다. 아직 프라임타임인 룰러에 1시즌 박아가며 키운 라이프까지 더해진다면 진지하게 롤드컵도 희망적이었다. 젠지원정대의 탄생이다.
하지만 20시즌 젠지는 타이틀을 하나도 따지 못했다. 팀합이 가장 잘 맞아 보이던 스프링에는 T1이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해 페널티를 받은 상황에서도 밴픽에서 말리며 3:0으로 졌고, 서머 때는 DRX와의 플옵에서 클라우드플레어 오류 때문에 몇 시간이 지연된 끝에 3:2로 탈락했다. 아니, 바다용 영혼에 오른도 있는데 마지막 바론 한타에서 지는 게 말이… 아니다. 여기까지.
그래도 선발전에서는 T1을 3:0으로 누르고 롤드컵에 갔지만, 이번엔 8강에서 G2에 3:0으로 짓눌려 버렸다. 서머 시즌 들어 기량이 급상승한 담원 게이밍이 소환사의 컵을 들며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동안 젠지는 예전과 달리 가을이 두려워지는 팀이 되는 것 같았다.
다음 해 젠지는 카리스와 영재라는 루키들을 서브로 추가하는 것 이외에 멤버 변경 없이 그대로 갔다. 스프링 때는 T1을 3:0으로 누르며 드디어 뭔가 보여주는 건가는 희망을 보여줬으나, 결승에서는 담원 기아에 여지없이 3:0으로 졌다. 서머 때는 초반에 드디어 팀합이 맞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번엔 진짜 다른가 싶었지만… 정규시즌 때는 결국 2위로 밀리더니 플옵에서 T1에 3:1로 패배했다. 그래도 이번엔 선발전 안 가고 바로 롤드컵 가긴 한 게 위안이던가.
아이슬란드에서는 조별리그 때부터 (한국시간으로) 새벽까지 가는 혈투 끝에 간신히 8강에 가고는 한국을 사랑한 크로아티아인의 가호 속에 C9을 누르고 4강에서 EDG를 만났다. 라스칼이 레넥톤을 잡고 클리드가 리신을 잡으면 안 되는 각도 되는 각으로 만들면서 결승 진출이 눈앞이었지만, EDG는 치사… 아니 현명하게 핵심 픽을 밴해버렸고, 젠지는 결국 3:2로 패하고 말았다.
19시즌 때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담담히 지켜봤다면, 20시즌과 21시즌은 대단히 괴로운 시즌이었다. 확실하게 손에 들어오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완전히 놓아줄 수 없는, 우승반지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는데 끝내 잡히지는 않는 상황이 팬으로서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렇게 괴로운 상황에서도 룰러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앞서 젠지원정대의 팀합이 가장 좋았다던 20스프링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룰러의 폼이 (최대한 좋게 말해) 100% 컨디션은 아닌 상황이었다. 그럴 때도 룰러라면 캐리해주겠지라는 믿음이 있었고, 룰러는 대부분 그런 바람에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05
젠지원정대의 우승 실패에 프런트에서는 다시 한번 칼을 빼들었다. LGD와 농심에서 운영전도사로 거듭난 피넛을 비디디와의 트레이드로 데려왔고, 비디디가 떠난 자리는 젠지원정대를 여러 번 물 먹였던 쵸오오오비를 데려왔다. 라스칼 대신 데려온 탑은 KT에서 도브와 함께 공동원장님이 된 도란이었고, 서포터로 리헨즈를 추가하며 운영을 보강했다. 이번에는 무력과 지력이 둘 다 되는 팀이었고 기대감도 엄청났다.
올해 스프링은 하필 코로나 때문에 주전 멤버가 돌아가며 롤파크 대신 숙소에서 게임하던 때였고, 팀합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악재 속에서도 젠지는 2위에 올랐다. 단지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T1이 너무 대단했을 뿐.
다행히 도넛츄러스 5인방은 스프링 플옵에서 다시 뭉칠 수 있었고, 담원 기아와의 혈투 끝에 3:2로 결승까지 올라갔다. 비록 결승에서는 T1에 3:1로 졌지만, 이번에는 꽤나 희망적이었다. 담원 기아와의 플옵 5세트에서 캐니언의 니달리가 정글을 지배할 때, 나는 80% 정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차이를 좁히더니 결국 넥서스를 먼저 깬 것은 젠지였다. 이때 나는 이번 시즌 언젠가 우승컵을 손에 들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22서머 시즌 젠지는 더 강해졌다. 룰러는 2,000킬을 달성했고, 쵸비는 CS와 한타뿐만 아니라 플레이메이킹에서도 뭔가 보여주기 시작했다. 피넛은 그냥 롤도사였고, 리헨즈의 신지드는 모든 이들에게 공포였으며, 위기의 순간에는 도란이 있었다. 팀적으로도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렇게 강릉에서 열린 결승에서 젠지는 드디어 LCK 우승을 차지했다. 룰러가 LCK에 데뷔한 지 7년 만에 LCK의 최강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22서머 젠지가 찍어대던 지표는 역대 롤드컵 우승팀의 서머 시즌과도 겨뤄볼 만한 수준이었다. 보는 팬 입장에서는 참 재미있었다. 아마 도넛츄러스도 재미있었겠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출전했던 롤드컵을 돌아보는 생각은 다소 복잡하다. 왜 첫날부터 세나-신지드를 꺼내 들며 스스로 길을 어렵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8강에서 담원 기아와 또 5세트를 가고 그 5세트에서도 룰러가 쿼드라킬하기까지 안심할 수 없었던 건 롤의 신이 내려준 시련이니 싶었다.
그렇게 애틀랜타에서 열린 준결승은 더 생각하기 어렵다. 왜 1세트에서는 1만 골드 이상으로 체급차를 보여주던 팀이 갑자기 2세트부터 꼬이기 시작한 건지는 지금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 쵸비의 저점이 하필 그때 터진 건지, 분명 참을 때는 잘 참던 팀이 갑자기 급해진 건지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데프트와 DRX가 하늘 앞에 더 간절했던 건가. 아니면 망할 호랑이 비슷한 게 하늘의 역린을 건드린 건가. 아무튼 롤드컵 뮤비의 주인공은 쵸비였지만 이번 롤드컵의 진짜 주인공은 데프트와 DRX였다.
그래도 젠지 팬으로서는 한 60~70% 정도는 만족할만한 시즌이었다. 일단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 했던 리그 우승을 깔끔하게 이뤄냈다. 도란과 쵸비가 아직도 프라임타임이고, 룰러와 피넛, 리헨즈는 내년에도 1~2코인 정도는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초짜 감독 스코어도 첫 시즌치고는 성공적이었다(적어도 영달펀치보다는 좋게 볼 구석이 많았다).
그런데 그 결말이 룰러가 LPL(아마 징동)로 떠나는 것이라니. 몸도 아픈 상황에서 한동안은 충격 때문에 브런치 글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다. 루머에 따르면 369-카나비-나이트-룰러-미씽으로 이어지는 슈퍼팀이 탄생한다고 한다.
06
내게 룰러는 무엇이었는가. 허영무 이후 한동안 관심이 식어 있던 팀을 다시금 응원하게 된 힘이었다. 잘 나갈 때나, 못 나갈 때나 게임이 30분만 지나면 결국 찾게 되는 보험 같은 존재였고, 팀이 힘들 때도 팬들이 삼성-젠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던 프로게이머였다.
무엇보다 그동안 다년 계약을 유지하며 젠지로 코어 자원으로 남아 꾸준히 활약해준 것이 고맙다. 강찬밥이 큐베는 버리고 무지성 원딜 키우기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젠지원정대나 도넛츄러스로 팀을 재편할 수 있었던 것도 룰러라는 코어가 꾸준히 탑클래스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년 계약이 끝나면 선수들 유니폼 색깔이 매번 바뀌는 이 바닥에서 젠지 팬들에게 룰러는 페이커만큼이나 소나무 같은 친구였다.
물론 그만큼의 희생도 따르는 일이었다. 슈퍼팀 젠지 체제에서 룰러는 그 누구보다 연봉을 짜게 받았을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룰러는 계약 기간 동안 군소리 없이 고고히 킬을 쌓았다. 이제 커리어로든, 금액으로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을 존중한다.
물론 젠지도, 팬도 룰러 없는 LCK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다행히 도란-피넛-쵸비는 그대로고, 새 원딜로는 유망주 때부터 룰러맛을 내기 시작하던 페이즈가 있다. 룰러를 2배 부풀린 것 같은 인상의 딜라이트도 브리온 때부터 ‘구국의 결단’을 내리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모습을 보여왔다. 올해처럼 롤드컵 우승 컨텐더까진 아니더라도 롤드컵을 가는 건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어쨌든 룰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여러 가지다. 징동이든 어디든 가서 젠지 때처럼 열심히 해주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우승컵 좀 많이 들어보는 것. 물론 롤드컵에서 친정팀이랑 만날 때는 좀 살살해주고…
무엇보다, 젠지와 함께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