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어니언 Jan 09. 2024

두 발 자전거

나의 강박을 알아차리다.

오랜만에 대공원 정문으로 나섰다. 코로나 시절 우리의 놀이터였던 대공원 잔디밭. 돗자리를 펴고 공놀이, 비눗방울, 물총 등을 가지고 놀던 행복이 담긴 장소다. 주말의 패턴을 다양화하면서 방문이 뜸해졌는데, 어느 날 씻다가 갑자기 대공원 가자는 얘기를 한다. 우리가 그곳에서 함께한 시간들이 기억이 났나 보다.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얘기하는 기쁨에 주말에 대공원 정문으로 향하는 계획을 세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는데 공기가 차다. 계획한 것은 무조건 행해야 하는 파워 J인 우리 가족 모두, 내려간 기온이 우리 행동을 멈추는 요소가 아니다. 어제 머릿속으로 그렸던 오늘의 장면을 몸으로 그대로 옮긴다. 대공원에 주차하고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몸을 움직이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 순간 대공원으로 향하는 들뜬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문을 통과하여 앞장서 잔디 밭쪽으로 달린다. 그래, 아이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우선이란 마음을 가진다. 두 볼에 따갑게 내려앉는 차가운 바람을 가로지르며 아이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간다.


아이가 손에 있던 돗자리를 스스로 펼쳐 본다. 기특하다. 성장해서 스스로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그때 거꾸로 펼쳐진 돗자리를 바로 잡는 나의 이성적 자아가 출현하여 뭉클함을 눌러 버린다. 여기 올 때 항상 함께 했던 김밥을 두줄 꺼낸다. 하나, 둘 밥알을 입에 머금은 채 가지고 온 축구공을 발등에 맞추며 잔디 위를 뛰어다닌다.


매주 2회 축구 수업을 다니는 아이의 실력은 예전에 여기에서 공을 차고 놀던 아이가 아니었다. 체계적으로 1년 가까운 시간 배워왔던 습관이 녹아들었다. 양발을 사용하며 공을 다루고 축구 센터에서 배웠던 드리블 패턴을 알려준다. 엄마와도 같은 축구 센터에 다니고 있어 우리는 함께 수강생처럼 순서대로 공을 다룬다. 예전에는 뻥뻥 차면서 앞으로만 나아가던 아이가 같은 장소에서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서로 패스도 하며 상호 작용을 한다. 우리 아이가 상호작용이라니, 아이의 협업하는 모습에 뜨거워지는 가슴과 눈을 어루만진다.


아이가 자라나는 시간 동안,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부분이 걱정되었다. 또래들과 있을 때 겉도는 느낌과 무리에서 하는 얘기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하는 부분, 그리고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부분만 표현하는 행동들이 떠오른다. 아이의 모습에서 기시감이 든다. 나의 어린 시절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는 타인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내 생각에 심취하여 현재의 상황을 잘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도 모르고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다음 행동만 생각한다. 집중하지 못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하며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졌는지 고민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반응한다. 이런 성향을 알아차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이가 나의 이러한 부분을 무척 닮았다. 걱정이다. 힘들 텐데, 주변에 친구들이 싫어하고 안 놀아주면 어쩌지? 상처일 텐데, 외로움을 언제나 품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을 텐데 혼자 얼마나 힘들까. 나는 어린 시절 친구가 없다. 친구라고 하는 주변 지인은 고등학생이 되며 사귄 친구들이 지금까지 연결되는 존재다. 초등학생, 중학교 시절 친구가 없다. 고등학교 친구 중, 중학교 때 연속성이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그 시절의 애틋한 추억은 없다.


나의 어린 시절과 비슷할까 걱정이다. 어린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인지 못한 행동들이 주변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나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관심의 표현이었는데, 이해와 공감이 부족했다. 주변은 이런 나를 불편해하며 멀리 했을 것이다. 무리에 함께 하지 못해 속상했다. 외롭고 적적한 마음이었다. 아이가 또래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어울리지 못하고 어린 시절 나처럼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껴 자신감을 잃고 주눅 들어 위축될 모습이 걱정이다.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패턴을 지켜봤을 때 가능성은 조금 더 있는 편으로 보인다.


그런데 축구하면서 서로 패스하고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같이 하자며 제안하고 움직인다. 그리고 순서를 지킨다. 대견하다. 성장한 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스스로 잘할 수 있는데 믿음이 부족했다. 주변의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축구에서부터 상호작용을 배워가면 되는 것이다. 걱정은 조금 넣어두고 8살인 아이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축구가 끝나고 우린 자전거를 타러 이동한다. 늘 네 발 자전거만 탔는데 두 발 자전거를 타보겠냐는 제안에 거리낌 없이 '응'이라 대답한다. 기특해 보이는 아이에게 반드시 잘 타게 하리라는 의욕이 올라온다. 운동이든 무엇이든 처음 할 때 제대로 해야 습관이 잡힌다라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두 발 자전거를 타겠다고 할 때 제대로 된 자세를 갖추고 타길 바랬다. 기울어진 자전거를 똑바로 세운다. 흔들리는 자전거를 내 손으로 부여잡는다. 자전거는 자꾸 왼쪽/오른쪽으로 위태하게 넘어간다. 분명히 얘기를 했는데 자세를 고쳐 잡지 않자 내가 흥분하며 화를 낸다.


'왜 알려준 대로 하지 않아? 핸들을 똑바로 힘 있게 잡으라고! 그리고 균형을 유지해! 넘어가는 반대편으로 힘을 줘서 균형을 맞추라고 몇 번 얘기해'


그러면서 아이가 탄 자전거가 기울어지자 잡지 않고 넘어지게 내버려 둔다. 흥분한 감정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잘못했다. 아내가 말한다.


'오늘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를 타는 거야 너무 들뜨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인라인을 왜 안타는 줄 알아?'


뜨끔하다. 아이의 감정을 무시한 채 잘 타야 하는 것을 알려줘야 하겠다는 의무감에 매몰되었다. 그 의무감도 정상적인 것도 아닌 나의 강박을 아이에게 요구한 것이다. 놀이의 즐거움이 먼저인데 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윽박질렀다. 놀이를 훈련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처음 타는 두 발 자전거에 대한 설렘과 도전하는 뿌듯한 마음의 충만이 가득했을 텐데 아이의 감정을 짓밟아 버렸다.


후회했다.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갇혀있는 생각과 강박으로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었다. 참 못됐다. 그리고 너무 미안했다. 오히려 내가 이 세상과 접점을 이어가지 못하면서 아이가 사회성을 가지며 이 세상과 잘 어울리길 바랐던 것이다.


놀이로 즐기지 못하고 왜 훈련이 되었을까. 어린 시절 공부 한다고 학원을 가거나 다른 취미활동을 하기 위한 비용이 지출되면 어머니에게 부합하는 성과를 내야 하는 것으로 강요받았다. 그렇게 성장해서 지금의 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무언가 시도하는 데 있어 높은 성과를 기대하게 되었다. 부응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으니 살아왔던 대로, 몸과 머리가 기억하는 대로 흥분하며 윽박지르고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나의 문제야. 아이의 사회성 결여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나의 강박과 배려와 포용이 부족한 나를 발견한다. 변화해 보자. 문제를 알아차렸으니 바꿔 보자.


아이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만큼 나 역시 힘을 키워보려 한다. 공감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힘을 키워보려 한다. 부족했던 배려를 넓혀 보겠다. 좁은 나의 세상을 조금 더 확대해 바라보겠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세상을 알아가며 배우는 존재다.


내 눈에 단단히 고정된 핀을 하나씩 걷어 낸다. 다양한 세상을 알아보려 한다. 성공, 출세, 드높은 명예로 설정된 나의 회로를 조금씩 뜯어고친다. 내가 지나간 시간들도 이 세상에 존재하듯 다른 세계도 있음을 수용하며 알아차린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려 한다.


아이와 다시 두 발 자전거를 타러 갈 예정이다. 아이의 즐거운 놀이와 성취감을 느끼며 성장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하고 싶다. 나의 모습을 알게 한 둥그런 바퀴를 떠올린다. 페달을 힘껏 밟아보자. 과거를 뒤로 내 보내고 변해가는 나의 모습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너와 나는 두 발 자전거와 함께 하며 세상을 또 알아가며 나아간다.


작가의 이전글 고전은 어려운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