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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dTiger Oct 04. 2022

BTS는 왜 아저씨들도 응원할까?

결코 가볍지 않은 음악 속 세대별 가치관의 차이

  아미라 부르기엔 민망하지만, 난 나름 bts 모든 앨범의 수록곡을 다 꿰고 있고, MV나 방송 기타 안무 영상(특히 dance practice)도 지겹도록 봤으며 그 문화에 취하고 싶어 춤(idol과 피땀눈물 선에서 포기했지만...)까지 배우러 다녔던 숨은 bts 팬이었다. 굳이 숨은 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학창 시절부터 나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허세, 그중에서도 대세에 쉽사리 편승하면 멋없어 보인다는 편견이 내면 깊은 곳에서 내 취향 발산을 방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친구 집에 놀러라도 갔다 하면 항상 bts 영상을 틀어댔고 때문에 리모컨을 뺏기기 일수였다.

  가히 K-콘텐츠의 전성기다. 아니, 벌써 전성기를 논하기엔 이르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전 세계가 대한민국 콘텐츠에 열광하고 있다. 하지만 난 오늘 그런 글로벌 반응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난 한국인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bts에 보내는 열광을 뉴스 기사 이상으로 공감하긴 힘들다. 하지만 내가, 아이돌이라곤 1,2세대 통틀어 단 한 번도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내가, 심지어 나의 아이돌은 크라잉넛이었다는 헛소리나 하는 내가 bts에게는 분명한 '팬심'을 느꼈다. 컴백 앨범을 듣자마자 그들의 다음 앨범이 궁금했고, 그들의 창작물을 감상하는 것이 행복했으며, 사안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고 그들이 더 성공하길 간절히 바랬다. 내가 변한 걸까? 문화 산업이 커지며 자연스레 정비례한 아이돌 아티스트 작품의 퀄리티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물론 그들의 노래, 안무, 비주얼(!)이 내 팬심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일조 한건 사실이다. 처음엔 존재도 몰랐던 choreography라는 분야에 대한 리스펙도 'mic drop'과 '봄날'을 보며 생겨났으니. 하지만 그걸론 부족했다. 그건 평생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말을 오그라들어서라도 못했던(한심...) 내가 당당히 팬심을 밝힐 만한 이유는 아니었다. 난 그들에게 풍긴 락의 향에 취해 있었다. 음악이 아니라, 브랜딩에서.

  처음 bts가 내게 각인된 건 군대에서였다. 아이돌에 관심 없었느니 뭐니 해도 그땐 트와이스 전 곡의 안무를 따라 출 정도는 되었다(팬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애국가 외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환경이었으니). 하지만 남자 아이돌 무대 감상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가끔 음악 방송을 스킵하기 귀찮을 때 스쳐 지나가며 보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리모컨 주인의 귀찮음으로 우연히 '봄날' 무대를 보게 되었다. 

아이돌에 대한 내 시선을 180도 바꿔버린 봄날의 MV 장면


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까 더 보고 싶다
얼마나 기다려야 널 보게 될까
추운 겨울 끝을 지나 다시 봄날이 올 때까지
그곳에 좀 더 머물러줘, freind

  수많은 멍청한 수컷들이 종종 그러하듯, 조금 힘들다고 동굴에 숨어 지인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다 도망치듯 군대에 온 나에게 봄날의 가사는 그 자체로 위로였고, 공감이었으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용기 내 다시 연락할 수 있게 해 준 나침반이었다. 물론 그저 가사만 의미 있게 다가온 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안무와 그 수행능력을 보여주는 bts의 무대는 감동+감탄+경탄을 자아냈고, MV의 퀄리티는 충격적이었다. '고민보다 Go'의 위트와 '피,땀,눈물'의 멋을 추종하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저 노래였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저 노래 하나가 나에게 '팬심'을 만들 순 없었다. 하지만 성공 경험의 진짜 가치는 다음 성공을 위한 도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 않던가. 난 bts의 다른 노래들도 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감상했고, 그 결과 음악은 물론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소위 bts라는 '브랜드'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내게 bts는 힙합이 아니라 락이었다. 그들이 힙합 장르로 음악을 시작했고 여전히 힙합에 가까운 음악을 선보이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들에게서 난 내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문화적 언어를 잡아먹은 락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음악적 노스탤지어라 하던가. 절대다수의 사람이 10대에 즐겼던 음악 장르를 평생 좋아한다고 한다. 적어도 개인의 차원에선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형이 사 온 카세트테이프로 처음 접한 '크라잉넛'류 펑크락이 먼발치에서라도 들리면 가슴 뛰는 걸 보면 말이다. 밴드 음악뿐만이 아니다. 버즈의 나루토, 코요테의 원피스, 대부분의 사람이 들으면 알지라도 기억 저편으로 보내버린 수많은 일본 만화 주제가(심지어 우리 집에는 투니버스는 나오지도 않았는데!)를 아직도 흥얼거리곤 한다(물론 그중 절대다수는 가슴 뛰게 하는 밴드 락 음악인 건 안 비밀. 그런 의미에서 세븐틴의 "널 찾아가고 있어"같은 노래가 진짜 너무너무너무x100 좋다!). 이러한 내 노스탤지어는 단지 사운드에 국한된 걸까?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날 지배하고 있는 유년의 기억은 사운드뿐 아니라 그래픽, 기분, 향기, 에피소드 등 내 모든 경험이 총체적으로 결부된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는, '낭만'이라는 키워드가 자리하고 있다.

점프 영광의 시대를 만들었던 만화 3원칙 : 우정, 노력, 승리

  60년대 창간한 일본의 만화 잡지 '소년 점프'는 80년대 들어 점프 만화의 3요소를 정립한다. 바로 '우정, 노력, 승리'.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밀레니얼 세대의 유년기 문화를 일본 만화 빼고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만화책,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기억도 가물가물한 더 어린 시절에는 비디오테이프까지. 수없이 쏟아지는 일본 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라난 밀레니얼 세대에게 그 문화적 유산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유산의 대표적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우정, 노력, 승리로 대표되는 이름바 '낭만'이다. 친구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 게, 안되면 될 때까지 도전하는 게, 수없이 많은 상처를 딛고 결국 성취를 해내고야 마는 게 '멋'이고 '힙'했던 시절이었다. 락밴드의 음악 또한 이런 낭만을 자극했다.

우리는 달려야 해, 바보 놈이 될 순 없어.
내게 허락된 건 거친 미래라 해도, 나를 깨운 꿈에 모든 걸 걸고 달려갈 거야.
거센 바람, 높은 파도가 우리 앞길 막아서도 결코 두렵지 않아.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 거야.
젊음아, 거기 젊음아, 이 모든 것을 즐겨.

  신나는 드럼 비트와 째지는 일렉 소리, 무대 위 가수들은 지금 가슴 뛰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낭만을 노래했다. MP3로 이런 노래를 듣고, 만화방에서 빌린 책으로 소년 성장물 만화를 보고 있자면 거대한 사회적 부정에도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고, 남들이 미쳤다고 말하는 시도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내가 힘들 때면 언제든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밀레니얼 세대가 정치적으로도 진보 성향이 강한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갔다. '중산층'이라는 과실이 적어지며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낭만을 꿈꾸기엔 현실의 짐이 너무도 무거웠다. 사회적으론 더 풍족해졌지만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아이러니한 상황. 기성세대와의 마찰은 당연한 결과였다. '라떼는~'으로 시작되는 기성세대의 비교 대상은 적절치 않았다. 다 같이 가지지 못했을 때와 모두 다 가졌는데 나만 가지지 못하는 것은 같지 않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생물인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리라.

  "요즘 애들은 낭만이 없어~."라는 말은 상당히 무례하다. 낭만엔 비용, 리스크가 따른다(로스트아크 전 디렉터 금강선도 "낭만을 위해선 낭비가 필요하다"라고 표현했듯이). 그리고 Z세대가 느끼는 낭만에 대한 리스크의 크기는 (경제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너무도 크다. 개인 차야 있을지언정, Z세대는 과거 세대가 그때 누릴 수 있었던 것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잃을 것도 많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내가 누려왔던 생활 수준을 누가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아예 처음부터 나 기타 주변 사람들이 가진 게 적을 때야 모르겠지만, 지금은 눈만 돌리면 생활 수준을 포기하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나만 그걸 누리지 못할 거라는 공포는 쉬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물론 그 요인을 하나로 특정할 순 없을 것이다. 줄어든 기회, 평균 올려치기의 선두주자 SNS 등 원인이야 어찌 됐든 공포 그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이런 상황에 낭만이 없다고 나무라는 것은 바닥에서 5미터까지 외줄을 타고 올라온 사람이 5미터에 매달린 사람에게 10미터까지 못 올라간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공포의 수준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10년대, 이 세대에게 위로를 건네고 공감해준 음악이 난 힙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거 낭만의 시대와 함께한 힙합 아티스트들은 한반도 스타일에 맞게 반항, 도전, 낭만 뿜뿜하는 음악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내었다(지금도 여전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노래는 Z세대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깨져도 도전하고, 나보다 남을 더 챙기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스토리를 보면서 '나만 비겁한가? 나만 겁쟁이인가? 낭만 없이 현실에 몰입하는 나는 정말 '나쁜'사람인가?'라는 자기혐오에 빠지려 하는 Z세대에게 '이기적인 게 왜 나빠? 똑똑한 거지', '남 눈치 보며 살지 마. 너 하나만 생각해', '착한 척하려 애쓰지 마, 가식보단 솔직한 게 멋있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힙합 아티스트들의 위로는 효과적이었다. 이제 예의보단 솔직한 게 '멋'이고 희생보단 나에게 집중하는 모습이 '힙'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본디 유행은 돌고 도는 것 아니던가. 이제 이런 '힙'한 자기애적 태도도 점점 '멋'있음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기준을 찾지 못한 자기중심적 태도에 대중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범죄&마약으로 대표되는 아티스트들의 삶은 누군가에겐 '멋'있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동백꽃 필 무렵',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같은 소위 '착한' 문화 콘텐츠가 다시금 힘을 얻고 있다.

증거 하나 없이 모두를 납득시킨, '미국 부모에게 bts가 인기 있는 이유'

  봄날로 입덕 한 나였지만, bts의 다른 노래에도 '낭만'은 가득했다. 'Not today', '쩔어'를 듣고 있으면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idol'이나 'mic drop'같은 노래에서조차 자신감 뿜뿜하는 낭만에 찬 캐릭터가 보였다. 돈, 여자, 마약을 노래하는 음악에는 전혀 눈길이 가지 않았고, bts의 노래를 들으며 난 락 정신을, 음악적 노스탤지어를 느꼈다. 적어도 나에겐 bts의 존재가 락에서 힙합으로 넘어갈 때와 같은 대중문화적 이정표로 느껴졌고, 그 뒤 꽂히는 아이돌 노래를 들을 때마다 해당 아티스트의 '브랜딩'에 녹아 있는 가치관을 찾아보게 되었다(모두는 아니지만 놀랍게도 상당 수의 그룹이 자의든 소속사의 전략이든 이러한 가치관을 브랜딩에 녹이고 있었다!)

  "락은 착하고 힙합은 나빠!" 같은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쓰고도 정말 말도 안 되게 편협한 문장이다(반례는 나도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그럼에도 락과 힙합이란 언어로 세대를 구분해 보는 건, 그 시도가 세대 간의 이해를 도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사회의 거울이다. 그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와 위로를 사람들은 추구할 뿐이다. 다만 나처럼 노스탤지어를 지배하고 있는 '낭만'을 그리워하는 아저씨들에게는, bts와 같은 아티스트의 등장이 그저 반가울 뿐이다.


ps. NMIXX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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