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넷플릭스를 보다가 흥미로운
드라마를 발견했다.
한일 합작으로 만든 로맨스 드라마였는데
예고편을 보니 이건 꼭 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차도 8회뿐이라서 보는데 부담이 없었다.
시선공포증을 앓고 있는 여자 이하나와
결벽증을 앓고 있는 남자 후지와라 소스케,
이 두 사람을 중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하나는 자신의 스승인 겐지의 배려로
르 소르베라는 가게에 익명의 쇼콜라티에로
초콜릿을 납품하고 있었다. 겐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길 바랐다.
그녀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소중한 지인인 겐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큰 슬픔에 빠진다.
겐지가 사장으로 있었던 르 소르베에도 큰 변화가
생긴다. 대기업인 제과회사에서 르 소르베를 인수하고
회장의 아들인 소스케가 새로운 사장으로 부임한다.
르 소르베의 메인 상품은 레인보우 팔레트로
7가지의 초콜릿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곳만의 특색 있는 상품이었다.
여기에 하나가 납품하고 있는 퓨어 겐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납품을 받지 못해 판매가
중지된 상태였다.
슬픔에 허덕이던 하나는 마음을 다잡고
겐지의 바람대로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자신이 익명의 쇼콜라티에라는 걸 밝히기 위해 가게 앞에서 심호흡을 한 뒤
비장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만 알바 지원생으로
오해를 받고 소스케와 면접을 보게 된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대화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홀 직원으로 합격을 받는다.
도저히 자신이 없었던 하나는 소스케에게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하다 함께 넘어지게 된다.
타인의 눈을 보지 못하는 하나와
타인을 만질 수 없는 소스케는
넘어지면서 서로의 눈을 보게 되고,
또 피부가 맞닿게 된다.
하나는 어릴 적 엄마와 나눴던 대화를 회상한다.
하나의 엄마는 하나가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면 위험한 인물이거나 운명의 상대 둘 중
하나라고 했다. 그녀는 소스케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며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이후의 이야기는 홀 직원으로 채용된 하나와
사장인 소스케가 초콜릿과 관련된 일들을 함께 겪고 해결하면서 진행된다. 원자재를 납품하는 거래처를
함께 방문하고 30년 전 초콜릿의 맛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함께 하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고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초콜릿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정주행으로 쭉 볼 만큼 재밌고
간질간질했으며 설렜다. 초반엔 안 좋게 만났다가
오해를 풀고 사랑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가 가득한 드라마였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어릴 적 자신 때문에 몸이 약했던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소스케는 자기 자신을 더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늘 커다란 가방에 옷을 넣어 다니고
약간의 땀만 흘려도 바로 갈아입을 만큼 청결에
강박증이 있었다. 타인과 손 끝만 닿여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심각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말고 타인과의 접촉이 처음인 그에게
그녀와의 접촉은 아련한 느낌으로 계속 남았고
그래서 그녀에게 눈길이 가고 마음도 더 갔다.
하나에게도 소스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처음 눈을 마주 본 사람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의기소침하게 지냈던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두려워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상대의 눈빛을 보면 식은땀이 나고 어찌할 줄 몰라
도망치기 일쑤였던 그녀에게 소스케는 얼마나
특별하게 다가왔을까.
유자잼 거래처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그녀를
데려다준 소스케는 용기 내어 하나에게 한번 더
악수를 청하고 그 둘은 손을 맞잡으며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게 된다.
소스케는 어릴 적 형과 손을 잡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눈가가 촉촉해지고 하나는 그런 그의 눈을 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처음 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도
소스케의 슬픔을 느끼며 눈물이 맺힌다.
그 둘은 서로에게 잊고 지냈던 감정들을 일깨우고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들을 선사한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그 둘은 본인들만 모를 뿐
점점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과정들이 부드럽고 천천히 흘러갔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크레셴도가 카푸치노의 거품처럼 따뜻하고
몽글몽글하게 다가왔다. 보통 드라마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데 로맨틱 어나니머스는 하루의 시간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공깃밥을 꽉꽉 눌러 담은
밥그릇처럼 하루의 순간들을 꾹꾹 담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두 남녀의 감정 변화도 세심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호기심이 호감으로, 호감에서 사랑으로
변해가는 감정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속도여서 좋았다. 이렇게 잔잔하면서 따뜻한 로맨스 드라마를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정말 반가웠고 보는 내내 행복했다.
극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두 사람의 사랑이
더 예뻐 보이게 연출한 모습이 편안하고 좋았다.
여백 없이 꽉 채운 해피엔딩도 이 드라마를 다시 볼
이유 중 하나다. 숲 속을 함께 뛰면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하나와 소스케의 웃는 얼굴이
뇌리에 박힌다.
결핍을 지니고 있던 두 남녀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아픔을 보듬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우리는 저마다의 결핍을 가지고 있다.
소스케와 하나처럼 눈에 띄는 결핍은 아닐지라도
각자 마음속에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살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며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새살이 돋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더 의미 있고 따뜻하게 다가올 것이다.
나 또한 정말 오랜만에 행복에 겨워하며 감성에
푹 젖어서 본 예쁜 드라마라서 더 의미가 있다.
로맨틱 어나니머스를 보고 난 후 계속 ost를
듣고 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소스케와 하나의 예쁜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초콜릿을 먹은 것처럼 달달하고 행복하다.
김은숙 작가님의 인터뷰에서 로맨스 드라마의 장점을 이야기한 대목이 절실히 이해된다.
점점 추워지고 있는 요즘,
따뜻한 초코라떼를 마시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 좋겠다. 그래서 나처럼 힐링받고
설렘을 느끼며 삶의 활력을 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