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로컬이 되는 법
직장인도 유학생도 아닌 그저 한 달 살기 식으로 미국에 머무는 관광객의 입장에선 하루하루가 무료함과의 사투다. 두 발로 어디든 닿을 수 있는 뉴욕과는 반대로 차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서부 캘리포니아에선 이런저런 제약이 많다.
한국에서 집순이로 살아가는 것과 미국에서 집순이로 살아가는 것은 외로움의 정도에 있어서 천지차이다.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유한한 이곳에서 나태함이란 곧 시간낭비, 돈낭비다. 따라서 매일 나갈 일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꼼짝없이 방콕행이다.
누군가는 유명한 관광지에 방문하고 여행객들이 추천해 주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관광의 일부라 여기지만 나는 '장보기'도 충분히 그에 걸맞은 관광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보기야 말로 우리가 잠시나마 로컬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해주는 액티비티 중 하나이며 시간 때우기에도 적합하니 일석 이조인 셈이다.
나는 매일 점심일과로 집 근처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마트로 장을 보러 다녔다. 매번 가는 똑같은 마트이지만 갈 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 두 시간을 머물던 세 시간을 머물던 눈치 주는 사람 없어 마음만 먹으면 종일 내내 장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온통 영어로 도배된 형형색색의 패키지를 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트를 끌로 이 코너 저 코너 돌아다나며 가격을 비교하고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잠시나마 그들의 일상에 녹아든 것만 같았다. 비록 여행자의 신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현지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No.1 간식이었던 Hummus. 후무스는 국내 마트에서 쉽게 찾아보기도 어려울뿐더러 아예 후무스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도 허다하다. 나 또한 해외 유튜버의 브이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후무스는 병아리콩으로 만들어 건강하고 채식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한다. 오리지널뿐만 아니라 스파이시, 아보카도, 올리브, 초콜릿 등 맛도 다양하다. 당근, 오이, 파프리카 등 채소뿐 아니라 나초칩이나 피타 브레드를 찍어먹기도 하고 토스트 위에 발라서 먹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다. 감자칩, 오레오 등 달고 짠 과자들이 널린 미국에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어줄 간식을 찾는 다면 후무스를 추천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듯 언제나 나의 발목을 묶게 하는 코너 중 하나는 아이스크림이다. 아직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수십 가지 브랜드의 알록달록한 패키징을 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하나 맛없어 보이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합도 상당했다. 또 비건, 저칼로리 제품도 많아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고자 할 때도 선택의 폭이 넓었다. 아래 사진은 내가 머물던 산타바바라 기숙사 근처 작은 마트 중 한 곳이었는데 확실히 가격에서부터 국내와 비교도 안되게 저렴했다. 개인적으로 견과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즐겨 먹던 것은 밴 앤 제리 피넛버터컵과 피스타치오다.
항상 '사탕보단 초콜릿'을 외치던 나에게 미국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형형색색의 초콜릿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진열대를 보다 보면 도대체 무엇을 집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최애는 있지 않은가? 백날말 고민해도 결국 내 손이 뻗는 곳은 항상 리세스 피넛버터컵이다.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에 피넛버터 조합은 굳이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입 베어 물면 먼저 달콤하고 크리미 한 초콜릿이 입안을 감싸고 그 뒤를 따라 피넛버터의 짭짤하고 고소한 풍미가 부드럽게 퍼지면서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달콤 짭짤함의 중독성은 한번 느끼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국내 카페를 갈 때마다 항상 아쉬웠던 점이 우유옵션이다. 우유, 두유 외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우유 자체도 밍밍하여 깊은 맛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나마 최근 변화를 거쳐 오트나 아몬드우유 옵션이 생긴 곳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지만 아직 더 발전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에 가기 전부터 벼르고 있던 것은 바로 우유다. 흔히 알고 있는 오트, 아몬드 외 마카다미아, 햄프, 캐슈, 라이스, 코코넛 밀크 등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특히 라테의 결정타는 우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음이 가득 담긴 컵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그 위에 Thick 하고 고소한 우유를 얹어준다면 훨씬 풍미로워진다. 브랜드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커피와 잘 어울리는 조합은 오트, 아몬드, 마카다미아라고 생각한다. 밍밍함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오트밀크를 추천하고 은은한 달달함을 원한다면 캘리피아팜스 아몬드밀크도 추천한다.
나는 병이 눈에 보일 때마다 언제든 그냥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도 있을 정도로 피넛버터를 좋아한다.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삶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항상 떨어지지 않게 구비해 놓는 식품 중 한 가지다. 피넛버터의 본고장답게 다양한 종류의 잼, 버터들이 줄지어선 진열대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중 꼭 시도해보고 싶었던 제품은 내추럴 피넛버터와 아몬드 버터. 스키피, 지프 같이 가공 피넛버터가 아닌 주로 땅콩과 소금만을 사용하여 만든 내추럴은 맛이나 점성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첨가물이나 안정제가 없어 오일층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섭취 전 고르게 섞어주어야 한다. 굉장히 꾸덕거리고 점도가 높으며 단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워낙 가공식품에 입맛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낯설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땅콩 그대로의 고소함과 담백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