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학생설계전공 '정신보건행정학' 제안 당시의 나....
‘자기의 정신건강을 돌보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심리학을 접한 이후로 늘 품었던 생각입니다. 자기를 조금씩 이해하고 인정해 나가는 것의 치유적인 힘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며 신체의 건강을 챙기듯이 정신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면 했고, 그렇게 되는 데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능력 있는 상담사가 되어 직접 상담을 하는 것을 통해 이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여러 이야기를 접하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전까지 제가 생각하는 ‘상담’은 수렁에 빠진 사람에게 동아줄을 던져주고 끌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상담은 같이 수렁에 뛰어들어 함께 허우적대며 한 발짝 씩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내가 아프고 소진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두려움을 이겨내고 상담전문가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으나 최저시급은 고사하고 무급으로 2년여를 버티는 상담수련생들. 누구보다 인지행동치료를 전문적으로 했음에도 행정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불법 의료행위자 취급을 받는 임상심리사들. 이들처럼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시작도 전에 지쳐버리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정신건강서비스 제공자가 많아질 때 서비스 전체의 진입장벽도 낮아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공자들에 대한 뒷받침이 먼저 마련되어야 했고, 이 ‘뒷받침’은 뛰어난 상담, 임상심리사 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제도적 시스템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정신건강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신건강을 돌보는 것을 일상적인 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제 나름의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상담이나 임상적 치료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입니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만큼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일어난다 할지라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고 느린 변화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정신건강에 있어서는 매우 결정적이고 중요한 변화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정신건강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발생했을 때, 그 한 사람을 둘러싼 가족과 사회가 얻는 긍정적 효과는 엄청납니다. 눈에 잘 띄지 않고, 수치화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공정신분야에 행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 오늘날의 모습은 행정가들의 상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부족과 단기 성과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상담 과정에 대한 몰이해와 행정 분야의 성과주의를 넘어서서 정신보건 분야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정가가 되고 싶습니다. ‘정신보건행정학’ 학생설계전공을 이수하는 것은 이에 다가가기 위한 첫 발자국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울증과 조현병 등의 증가 추세와 정신병에 대한 이해의 확대에 따라 개인 정신건강 상의 문제에 사회도 책임을 가진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지 정책을 설계하는 행정가의 대다수는 심리치료 과정에 대해 알지 못하고, 가시적인 성과나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우울증 예방 캠페인 확대, 의료보험수가 대상에서의 임상심리사 배제 등이 그 결과입니다. 시끌벅적하게 나누어주는 팸플릿이나 기계적인 수가 계산으로는 국민의 정신보건복지 수준을 향상하기 어렵습니다. 관련 정책을 효과적으로 설계하기 위해서는 정신보건분야에 관련된 지식을 갖춘 행정가가 필요합니다. 정신보건행정학전공은 정신보건분야에 대한 이해를 겸비한 행정가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공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학업 목표는 ‘상담, 임상 분야에 대한 이해’, ‘의제가 정책화되는 과정에 대한 지식’,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인식’입니다.
정신보건과 관련한 정책을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담, 임상 분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 전공의 상담 관련 수업들을 통해 각 상담 대상의 성질, 상담 기법의 특성 등을 아는 것이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할 때나, 적절한 지원체계를 갖추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정치외교학전공과 공공인재연계전공의 수업들에서 의제가 정책화되는 과정에 대해 배우고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구체화하는 방법을 모르면 실제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제를 정책으로 다듬어 실행하는 과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상상을 현실에 펼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더해 경제학전공과 사회학전공의 수업들을 통해 정책의 집행에 고려되어야 할 요소들에 대해 알고, 집행된 정책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새롭게 생겨나는 의제들에 대해 탐구하고 싶습니다. 여러 전공에서의 배움을 하나로 모아 정신보건분야에 능통한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외장하드를 뒤져야 할 일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이게 내가 썼던 글이라고? 싶다. 나 제법 멋진 꿈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저 성적증명서에 한 줄 더 적고 싶었던 마음 만은 아니었을 텐데. 저 글을 쓸 때는 나름대로 진심이었을 텐데. 이렇게 당찬 글을 쓸 줄 알던 아이가 닳고 닳아서 상담 필드에서 도망갈 생각만 하는 지금의 내가 된다니. 미안하다.
남겨놓은 정신보건행정학 전공은 후배님들이 한 분이라도 이수를 결심해 주면 좋겠습니다. 만들 때는 열심히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