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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지네언니 Jan 0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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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선물, 생일주간, 건강검진, 연말모임

식세기를 샀다. 내 건 아니고 엄마 거. 생각해 보면 일 년에 세 번 제사 지내고 두 번 명절을 챙기고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상까지 차리던 예전에 샀었어야 하지만 그때는 젊어서 해낸 거라 치고 다 늙어서 밥 먹은 설거지 하겠다고 서 있는 게 보기 싫어서 큰맘 먹고 질렀다. 그리고 덕분에 병이 났다.

사이즈 측정 다 하고, 컬러 고르고, 행사 지점 다 돌아다니면서 판매직원들 만나보고, 상품권이랑 쿠폰까지 딱 맞춰서 구매한 건데 막상 사전 점검에서 설치가 안된다는 거다. 그럴 리가? 엄마아빠는 그냥 거기서 안된다니까 돌려보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설치가 안될 이유가 없는 거다. 고객센터, 점검 나왔다는 직원, 매장 매니저까지 통화 다 돌린 후 낸 결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거다. 그래서 자가 설치 할 테니까 두고 가라고 했고 아부지가 전기 따고 배관 따서 한 시간 만에 설치 끝내고 시범 작동까지 성공. 말은 간단하지만 저 과정을 거치면서 스트레스받은 나는 밤새 대여섯 번을 넘게 토했고 일주일 내내 위장에 멍이 든 것처럼 욱신거리는 나날들을 보냈다.(이유가 있긴 했음)

아부지는 본인 닮아서 그렇다 그러고 엄마는 나이가 40인데 아직도 성질이 그래서 어쩌냐고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대고. 주변인들은 J를 인간화하면 너일 거라고 나를 비웃었다. 어쩌겠어, 이렇게 태어난 걸.


친구들이 보내준 선물
반지는 셀프 선물, 머플러는 엄마가 사줬다

생일이었다. 드디어 만으로도 어쩔 수 없는 마흔이 되었다. 늙는 게 서러운 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여서 그렇겠지. 그래도 생일이라고 선물도 받고 기분 좋은 연말이었다.


미루던 건강검진을 벼락치기로 받았다. 연말에 복잡해서 내시경 받기도 힘들다는데 집 근처에 공장식 건강검진 병원이 있어서 전날 예약 잡아서 해치워버렸다. 꾸준한 필라테스 덕인지 키가 좀 컸고, 열심히 처묵처묵 한 탓에 무게도 좀 늘었다. 그보다 큰 문제는 위내시경에서 나왔다.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속이 뒤집어졌나 했더니 위가 구멍 나기 전이었더라. 궤양이라는데 입술에 염증난 거랑 똑같이 생겨서 신기했다. 일단 조직 검사 하고 헬리코박터 균 검사 하고 적어도 석 달은 병원을 다녀야 한단다. 확인차 내시경을 한 번 더해야 되고. 디스크로 약 먹는 중이라 혹시 몰라 디스크약 처방전 찍어놓은 거 보여주니까 “이런 분들이 원래 위가 탈이 잘나요. 스트레스가 많고 예민해서.” 라더라. 아 네-

근데도 커피 끊을 생각은 못해서 12시간 공복으로 라떼 마시러 갔다. 정신 못 차리는 거지.


간만에 연말에 친구들 만났다. 다들 애 키우느라 바빠서 따로따로밖에 못 만나다 보니 셋이 만난 건 진짜 오랜만이다.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보는 사이지만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끊김 없이 연락을 이어가는 친구들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편하고 좋다. 애기들 맡기고 온대서 나름 핫플 찾아서 밥 먹고 맥주 마시고 차 마시고 3차를 돌았다. 만나면 추억팔이, 현생의 살풀이 뭐 늘 그렇다. 친구 중 하나는 벌써 일 년째 남편이랑 전쟁 중인데 그런 거 보면 나는 인간이 덜 돼서 결혼은 못하겠다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부족한 인간이라 별 수 없나 보다.


새해다. 별 감흥이 없는 게 확실히 늙긴 늙었나 보다. 그래도 연말인데 와인 한 병은 따야지 싶어서 마트 갔을 때 한 병 사다 놨다. 오랜만에 살라미랑 치즈도 깔고 와인잔도 꺼내놓으니 31일 기분 나더라. 새해 첫 곡으로 애들 노래 하나 듣고 와인 두 잔에 뻗어서 1일부터 늦잠 실컷 잤다.

다음 날 떡국 끓여 해장 와인 하면서 별 대단한 일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별 일은 없는 그런 한 해가 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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