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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연 Dec 13. 2022

자나 깨나 변태조심

07.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각종 성범죄, 흉악범죄 관련 사건 사고 소식들. 어느 여교사는 남학생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또 어떤 남직원은 여직원이 자신을 안 만나 준다며 스토킹 끝에 살해까지 한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저 자신의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온라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인터넷상에서 익명의 힘을 빌려 본인들의 본능을 마음껏 활개 치고 다니는 인간들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척, 온갖 고상한 척은 하면서 인터넷에서는 세상 변태 또라이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내가 아주 작은 것에 크게 반응한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상황을 겪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늘 타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저 사람은 무슨 의도로 나한테 저런 말을,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INFJ 아니던가. 블로그를 하면서도 예외는 없다. 생각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별생각 없이,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싸질러 놓은 문자들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럴 때마다 INFJ 특유의 기질이 발휘되어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블로그를 하다 보면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더랬지. 아무튼 내가 블로그를 하면서도 편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날들에 대한 기억이다.






체험단의 탈을 쓴 악마


스물세 살의 어느 여름이었다.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스팅 의욕이 절로 솟아오르던 때. 친구를 만나러 이대 앞의 모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갔다. 커피도 좋아하고 카페라는 공간 자체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열심히 매장과 음료 사진을 찍었다. 철 없이도 예쁜 척을 한껏 담은 셀카까지 함께.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포스팅을 했다.


며칠이 흘렀을까. 의문의 쪽지가 한 통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OOOO 커피 사장입니다. 얼마 전 저희 매장에 오셔서 글 올려주신 것 잘 보았습니다. 감사의 의미로 다음번엔 제가 커피와 디저트 대접해드리고 싶은데요. 다음에 저희 매장 근처에 오시면 010-XXXX-XXXX로 연락 주세요. 제가 따로 제공해드리는 거니까 매장에 얘기하지 마시고 꼭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당시 내 블로그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수준이었다. 내가 올린 그 포스팅이 좋은 키워드에 상위 노출되었을 리 없었다. 아직 내 블로그가 홍보 수단으로서의 영향력이 전무하다는 사실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협찬이나 체험단도 거의 들어오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찮고 보잘것없는 블로그에, 허접한 글 하나 올렸다고 카페 사장님이 친히 불러내 따로 대접을 한다고?


아직 협찬, 체험단을 활발히 하지 않던 시기라고 할지라도 그 무렵부터 나는 기업체의 온라인 마케터(객원 마케터)로 활동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영향력을 갖춘 동료 블로거들의 활동 노하우를 어깨너머로 배웠다. 노하우 중에는 협찬, 체험단 진행에 대한 부분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 이렇게 개인적인 연락처를 오픈하며 제안하는 케이스는 누구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실제 예약 과정에서 담당자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는 경우는 많지만, 대부분 매장의 모든 직원들이 예약 상황을 알 수 있도록 공유된다. 저렇게 매장 밖으로 따로 불러내는 경우는 없다는 말이다.)


만약 저 쪽지 하나에 홀랑 마음을 빼앗겨 시키는 대로 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다음날 뉴스 1면을 장식하게 될 수도, 우리 엄마 아빠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도, 아무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끔찍한 것은 내가 있는 일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내게 쪽지를 남긴 의문의 사람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블로거들에게도 같은 수법으로 접근할 것이다. 나는 워낙 겁도 많고 의심도 많아 단 한치의 믿음도 없었지만, 순진한 누군가는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공개적으로 글을 쓰자니, 왠지 그 사람이 나를 찾아내 보복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당 카페 후기글을 전부 찾아 댓글로 소문을 퍼뜨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사람이 꼭 그 카페 사장으로만 사칭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아무튼 쪽지 하나로 끝난 꽤나 싱거운 해프닝이기에, 그 사람의 진짜 의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 뒤로 블로그는 안정적인 성장 궤도에 올라, 각종 협찬과 체험단을 줄지어 받게 되었지만 늘 신변의 안전을 제1의 가치로 여겼다.


다른 블로거들도 조금 조심할 있도록 조금 빨리 글을 올리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작성한 이 글이 단 한 사람이라도 악의 손길을 뿌리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여기서 흥분을 느낀다고?

최근의 일이다. 말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작년에 나는 치질 수술을 했다. 몇 년 동안 고민만 하며 병을 키워오다 큰맘 먹고 결정한 일이었다. 마음먹은 김에 처리해버리자며 초진 당일 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지만, 불안한 마음에 몇 날 며칠을 블로그 후기만 읽어 댔다. 일자별로 나누어 아주 상세한 회복기를 남겨준 한 블로거의 후기는 실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수술이 끝나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줄 수 있도록 후기를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런데 수술이 너무 잘 된 건지 아니면 반대로 수술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상하리만치 정말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TMI지만 팔에 잘못 삽입된 무통주사가 오히려 더 아파서 그 비싼 무통주사를 24시간도 채우고 뽑아 버렸을 정도. 아무튼 수술 후 회복 기간이랄 게 딱히 없기도 했고, 막상 후기를 남기려니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치질 수술 관련 포스팅은 마음속에 묻어 두고, 가끔씩 한 번에 몰아 올리는 일상 사진 포스팅에 입원실 사진을 한두 장 끼워서 아주 짤막한 기록을 대~충 남겼다.


검색 노출을 노리고 올린 글이 아니라, 그저 나의 개인적인 기록 용도로 올리는 글이기에 해시태그도 달지 않았다. 지인들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민망한 마음도 들어서 자세한 설명 없이 '치질 수술했다!' 정도만 남겼다. 그런데 그런 글에 댓글이 달린 거다. 다름 아닌 치질 수술에 대한 질문이었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검색을 하고, 최신순 정렬로 맞춘 다음에, 가장 최근에 수술한 나의 글을 찾아 들어왔을까. 지어 치질 수술을 주제로 작성한 글도 아닌데. 수술을 앞둔 자의 불안감이 다시금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질문의 내용은 수술할 때 어떤 자세로 받느냐는 것이었다. '그래, 다들 치질 수술은 처음일 테니까 궁금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주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이었다. 어라, 그런데 또 댓글이 달렸다. 두 번째 댓글을 읽으니 이 사람의 저의가 그제야 파악되었다. 차마 그 댓글 내용을 그대로 여기에 적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설명한 자세를 성적인 관점에서 상상하며 나에게 재차 확인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검색 노출 의도가 전혀 없는 내 글을 찾아온 그 가상한 노력은, 수술을 앞둔 자의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더러운 변태 사이코의 성적 호기심에 불과했던 것이다.


치질 수술 장면을 상상하며 흥분하는 변태 사이코가 있다니, 세상에 정말 다양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면서 20대 시절 블로그를 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변태들이 떠올랐다. 스타킹 신은 사진을 찍어서 보여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이 노출된 포스팅에 집착 수준으로 댓글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온라인 세상에는 생각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또라이들이 있었다. 때는 그런 댓글, 쪽지 하나하나에도 몇 날 며칠을 힘들어했다. 지금이야 그냥 '악 더러워 미XX!!!'이라고 생각하고 댓글을 신고, 차단, 삭제해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아, 그런데 글도 용케 검색해 혼자 보면서 흥분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네?








스무 살에 혼자 상경해서 낯선 서울생활을 했다. 하필이면 내가 처음 상경한 그 시기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각종 납치, 인신매매 관련 썰들이 즐비했다. 방 안에서 혼자 벌벌 떨면서도 그 많은 썰들을 다 읽었다. 나한테 그런 상황이 생기면 기지를 발휘해 꼭 잘 대처해야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게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게다가 스무 살 여름에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인생 최대의 충격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이 내 머릿속을 관통했다.


각종 납치, 인신매매 관련 썰들과 영화 <악마를 보았다>. 이 두 가지는 내 20대의 멘탈을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낯선 사람을 보면 의심부터 했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 10시, 11시가 넘으면 혼자서는 절대 밖에 나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스케줄 근무를 하며 어쩔 수 없이 늦은 퇴근을 하는 날이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전부 공포의 대상이었고, 누가 쫓아오진 않는지 늘 뒤를 확인하며 집으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그래서 블로그라는 인터넷 공간에서도 유독 작은 일에 과민 반응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그 카페 사장이라는 사람이랑 일단 약속 잡아서 어떤 사람인지 멀리서 한 번 지켜보지!'


그런데 나는 그 정도로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 연락처를 알려주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이 글을 보는 사람들도 절반은 내게 동의하고, 절반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뭐, 이 살벌한 세상을 살아가며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나는 또 같은 일들이 생긴다면 나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을 것이고,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니까.





그나저나 온라인 변태들아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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