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마냥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중에서 내가 블로그를 하며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바로 이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창의성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인줄로만 알았지
어릴 때 나에게 글쓰기란 고역이었다. 매일매일 숙제처럼 써야 하는 일기는 그저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지 그걸 '글쓰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주입식 교육의 쳇바퀴에 한창 익숙해져 있던 중학생 때의 어느 날이었다. 뜬금없이 '내 인생의 가치관'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자는 선생님의 지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았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수업이나 하지, 오늘은 왜 갑자기 글을 쓰라는 거야. 게다가 주제도 너무 두리뭉실하고 어렵잖아?'
인생에 가치관이랄 게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았을 시기였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무엇을 써야 할지 정리조차 되어 있지 않은데, 도대체 어떤 글자들을 써 내려갈 수 있었을까. 갑자기 글쓰기라는 미션을 던져준 선생님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한두 줄 정도 썼나? 한 시간 동안 서론도마무리짓지 못한 채 텅 빈 종이를 제출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주제는 지금 글을 쓰라고 해도 막막하고 어려울 것 같다.)
나 자신이 부끄럽고 너무 싫었다. 그 후로 '나는 원래 글 못 써'라는 틀에 갇혔던 것 같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이후 대학 입시 시절 다른 친구들은 '논술'과 '자소서' 등을 활용한 대학 상향지원을 잘도 해 나갔지만, 나는 글쓰기에 영 소질이 없다는 이유로 '성적 100%' 전형을 고수하며 대학에 입학했다.
책 읽는 것은 꽤 좋아했으면서도, 글쓰기와는 그렇게 담을 쌓고 지냈다.
내가... 글을 잘 쓴다고?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필수 과목으로 '대학 국어 작문' 수업을 들었다. 과목 명만 봐도 내 관심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에, 만약 필수 이수 과목이 아니었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수업이었다.
그저 따분한 글쓰기 수업인 줄로만 알았던 예상과 달리, 첫 과제는 '내 전공과 관련한 주제 1가지를 선택해 하나의 논지를 갖고 발표하기'라는 팀플이었다. 빈종이를 글씨로만 채워야 하는 과제가 아니라서, 원하는 주제를 선정해 발표할 수 있는 과제라서 흥미가 생겼다. 고맙게도 팀원들은 내가 제시한 주제에 동의해 주었고, '최저임금제'와 관련한 PT를 만들었다.
(TMI :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법학과였으며, 당시 교양 필수 과목은 같은 전공 1학년 학생들끼리 들었다.)
주도적으로 준비했기에 자신 있었던 이유에서인지, 극 I에 발표 쫄보인 나도 그때만큼은 떨지 않고 발표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우리 팀이 조별 과제 1등을 하게 된 거다. 별 거 아닐지 모르지만 그때 교수님께서 우리의 과제에 대해 폭풍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과목에 대한 애정도가 한 층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는 한 학기 동안 본격적인 글쓰기 수업이 이어졌다. 세밀한 맞춤법 교정을 비롯해 일상에서 많이 쓰이지만 어색한 표현, 잘못된 비문들. 그리고 짧지만 A4 분량으로 된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내게 어떤 마법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학기 내내 그 수업에서 만큼은 교수님의 무한 칭찬을 받았다.
그렇게 대학 국어 작문 수업을 A+ 성적으로 이수하고 나서, 글쓰기에 조금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마침 몇 년 후 대학 졸업반이 되면 취업 준비를 위해 자기소개서를 써야 되기도 하니, 본격적으로 글쓰기 실력을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매 학기마다 '글쓰기'와 관련된 교양 과목을 꼬박꼬박 찾아들었고, 그때마다 수업에서 글 좀 쓴다는 학생 축에 낄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주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단련된 힘
블로그를 시작한 것은 '글쓰기'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대외활동 모집 현수막을 보고, 꼭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대외활동도 서류 전형과 면접 전형(심지어 1차, 2차 면접까지 있는 경우도 많았다)을 거쳐 선발되어야 하는데, 나는 소위 말하는 '무스펙자'였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블로그를 통한 PR을 시작했다. 꼭 마케팅 관련 대외활동이 아니더라도, 기업 혹은 기관에서 서포터스를 운영하는 것은 대외 홍보 목적이 1순위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 중이고, 홍보 채널로서의 영향력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만약 나를 서포터스로 뽑아준다면 해당 기업(or 기관)을 홍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라며 어필했다.
전략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나는 서포터스 활동을 정말 줄기차게 했다. 다 세어 보면 취준생 기간 동안 활동한 게 한 10개는 족히 넘었다. 일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작성해야 하는 글도 많아졌다. 하루에 많게는 서너 개의 글을 쓰기도 하고, 항상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쓰기 바빴다. 글쓰기가 일상 속에 그렇게 들어왔다.
작성한 글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다. 그 시절 블로그 로직 상 글 발행 후 수정은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던데, 완벽주의적 성향 탓에 어색한 부분을 발견하고도 그냥 두기란 견디기 어려웠다. 남들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 때문에, 행여나 내 글이 타인의 시선에 수준 미달이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그래서 가급적 발행 전 최대한 여러 번 읽어보며 표현을 고쳐 썼고, 발행 이후라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꼭 다시 들어가서 고쳐 썼다.
다른 사람들의 글도 많이 읽었다.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이모티콘을 남발해 가며 알맹이 없이 키워드와 글자수만 대충 채워 발행한 글들이, 그저 요즘 가벼운 웃음 소재로 돌아다니는 유머 짤에 지나지 않았다. 읽다 보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글도, 그냥 사진만 대충 훑고 나갈 수밖에 없는 글도 많았다.
'글 다운 글을 쓰고 싶다'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을 했다. 독자 편의 상 블로그 글은 '사진-글-사진-글' 형태를 유지해야 했지만, 사진을 빼고 글만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 다운 글이 쓰고 싶었고,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 그렇게 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더라
블로그를 함으로써 전에 없던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단련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글쓰기에 꼭 필요한 자질 중 하나인 '지구력' 하나만큼은 블로그를 통해 얻어졌다는 사실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나보다 블로그를 훨씬 더 잘 운영하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때 모두가 입을 모아 얘기했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바로 '꾸준함'이었다. 매일 하나씩 글을 발행하는 것. 블로그를 운영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일감이 많이 밀려 있던 시기, '하루에 글 하나 이상' 발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블로그에 새 글이 없는 날이 더 어색했다. '올려야 하는' 글이 없는 날엔 내가 '올리고 싶은' 글을 올렸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니 어느샌가 글쓰기에 멧집이 생긴 것도 같다. 아니, 멧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소위 '파워블로그'를 운영해 본 경험은 하나의 스펙이 되었고 지금도 마케팅 직무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마케팅에도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글 쓰는 마케터'라고 표현하고 싶다. 부끄럽게도 내 블로그와 브런치는 방치된 지 오래지만, 회사 블로그에는 매주 1개씩 글을 발행하고 있다. 그 글을 여러 채널 별 성격에 맞게 배리에이션 해서 배포하는 작업까지.
글쓰기만 하라고 뽑은 자리는 아니고, 나도 그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매일 비정기적으로 새롭게 발생하는 업무들을 하다 보면 '1주에 1 원고 쓰기'라는 규칙은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다.그래도 우리 회사의 블로그를 정체성 있게 꾸려가기 위해 일정한 톤 앤 매너로 끊김 없이 글을 발행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내가 짊어져야 할 과제이자, 이를 통해 나의 글쓰기 실력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글쓰기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블로그에 글 하나 쓰고 잠적해 버리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엄청난 명곡을 남기고 요절한 아티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블로그를 함에 있어서 꾸준한 글쓰기는 필수 불가결한 요건인 것과 동시에, 블로그를 하면서 얻게 되는 작은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A4 한 장 내 힘으로 채울 수 없던 어린 날의 나는 그렇게 블로그를 통해 알을 깨고 나왔다. 매일 나의 글을 마주하고 빈 종이를 나의 생각으로 채워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착실히 일구어 나가는 중이다.
어찌 보면 글쓰기는 마법이 아니라 알을 깨고 나와 내가 마주한 새로운 세상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