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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예지 Oct 11. 2022

가장 친한 친구

평생을 함께한 이와의 이별. 영원한 이별은 아니지만 헤어짐은 늘 갑작스럽고 마음이 쓰인다. 지난 과거가 한 시간짜리 드라마처럼 빠르게 머릿속으로 재생된다. 사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충분했고 이 이별은 내가 부추긴 거나 다름없을지도 몰랐다. 일어나는 감정들에 무딘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갑자기 차오르는 눈물을 보니 섣부른 판단이 우스워진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서로의 삶에 대해 촘촘히도 꿰고 있어 막상 마주 앉으면 나눌 얘기 하나 없는 하나뿐인 내 친구.


내 동생이 집을 떠났다.


과거에 우린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다. 먼저 태어나 있었기에 언니라 불려졌고, 그런 언니가 이제 막 자유를 찾아 뜀박질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동생은 나타났다. 우린 서로의 존재에 놀랄 틈도 없이 가까워졌다.


동생과는 한 번도 따로 방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걔가 태어나기 전에는 내 방이랄 것이 있었을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넘겨 버리고, 기억이 가 닿는 범위에서 떠올려 보면 우린 늘 같은 방을 썼다. 서로의 살이 닿을 때엔 소리를 꽥꽥 지르고 짜증을 내며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살았다. 살을 부비며 살아온 것치곤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나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게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했던 거다. 언젠가 떨어져서 살기는 할 텐데 그런 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동생과 함께 한 지난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동갑내기 친구들끼리 시간을 보내는 게 소원이었던 유년이다. 그건 다 동생이 나의 껌 딱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생의 친구들을 잘 몰랐어도, 동생은 나의 친구들을 다 알았다. 내가 혼자서 몰래 나가려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늘 동생도 데리고 가라며 나를 나무랐다. 언니라면 자고로 동생을 잘 챙겨야 했고 엄마와 아빠는 어쩐지 동생의 절대적인 지지자인 듯했다.


늘 사이좋게 붙어 다녔던 것은 아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들고서부터였을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넘쳐났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 그 맘 때에는 동생과 멀어질 일만 남았을 줄 알았다. 아주 잠깐의 철없던 첫 연애도, 학교에 가는 게 죽기보다 더 싫었던 그때도. 동생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 시절 내 인생에 벌어진 폭풍우 같은 일들을 그 애에게 말하기엔 걘 너무 어렸다. 우리는 고작 1살 차이였는데도 말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힘에 부치고 지겨워져서 다시 가까워진 건 아닌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봤는데 정말이지 이유와 시점이 기억나지 않는다. 싫으나 좋으나 집으로 돌아오면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혹은, 서로의 삶의 패턴이 비슷해졌기 때문에? 백 퍼센트 그 이유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비단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 애의 삶을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다. 앞으로 내 인생에 일어날 크고 작은 일들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시 콜콜 털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이,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을 만날 때처럼 시간을 내고 맞추어 만나야 한다는 것이. 나는 혼자서도 잘 놀고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른다. 홀로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취약한 사람일지도. 변화는 언제나 어렵고 무섭다. 헤어짐이 갑작스럽고 두려운 이유는 변화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뭐 해?”라고 자주 묻는다. 동생에게 시비를 걸 때 주로 사용했던 말이 이제야 제 뜻대로 사용되는 것이다. 영상통화도 자주 하고 메시지도 자주 주고받는다. 서로의 별일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투닥거리기 바쁜 자매이고 싶다. 내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해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한번 흘겨보고는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동생을 계속 보고 싶다. 기쁘거나 슬플 때 서로가 재빨리 생각이 나서 자기 할 말 만을 마구마구 늘어놓기도 하고, 현실의 각박함에 치이는 날이면 세상의 모든 욕을 함께 하고 싶다. 이렇게나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서로의 지금을 잘 알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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