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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예지 Dec 28. 2022

종이 몇 장에 담긴 것

 전기장판 위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자세만큼이나 무기력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축하의 말은 마음에 가지런히 담기고, 선물과 편지는 책상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나 담기고 쌓이는 것들이 무안해질 만큼 건조한 헛헛함도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생일날에 받은 마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일이 아닌 날의 내가 받았던 사랑을 떠올려 보게 된다. 여름엔 겨울을 떠올리고, 겨울엔 여름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맘을 정돈하고 싶을 땐, 진짜 내 주변을 정리 정돈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무거운 몸을 힘들여 일으켰다. 오른쪽 볼이 발갛고 따끈하다. 미처 뜯어보지 못한 선물들의 포장을 뜯고 적당한 공간을 찾아 정리했다. 그런 다음 편지들을 보관하기 위해 서랍 속 편지 상자를 꺼냈다. 곧바로 이어질 일은 생각지도 못한 채 말이다. 편지 상자를 여는 일은 시간을 넉넉하게 빼 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매번 그걸 간과하고 마는 것이다. 그 상자는 열리기가 무섭게 방구석 추억 여행의 안성맞춤 가이드로 변신했다.


가장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던 건 상자 깊숙이 자리해 있는 전 애인들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들과의 대화 속엔 온갖 부끄럽고 섬세한 단어들이 가득했을 텐데, 하물며 편지는 어떻겠는가. 강도가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 실재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편지 속 걔 네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진심이 담긴 사랑의 말은 무척 가까이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만날 일이 흔치 않아서 실제로 듣게 되면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러워졌다. 그걸 습관처럼 듣고 있었을 과거의 내가. 입술이 잘 트는 탓에 사시사철 지니고 다니는 립밤처럼 내 몸 곳곳에 착 붙이고 다녔을 사랑의 단어들이.


편지 상자 안은 편지 봉투만 봐도 떠오르는 발신자의 얼굴들로 가득했다. 과거의 언젠가만 절친했던, 현재는 어떻게 사는지 모를 몇몇 사람의 편지가 있기는 해도 촌스럽고 앙증맞은 편지 봉투를 고른 발신자들은 여전히 나의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들이었으니 말이다. 종이에 번져 있는 잉크를 따라 그때는 전부였을 과거의 일들이 저마다의 필체로 아기자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애와 노는 건 이 우정의 종말과도 같았던 때가 있고, 너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지지하고 응원하던 때가 있다. 너에겐 내가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 되려 노력하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이가 있다. 나의 별일에 나보다도 더 웃고 울어주는 기쁨과 눈물이 있다. 평생을 지켜내고 싶은 끈끈한 약속까지도. 우리의 관계를 증명하는, 친구들과 나 사이에 쌓인 이토록 귀엽고 당당한 증거물이라니. 편지 봉투만 보고도 단번에 누가 쓴 편지인지를 파악하는 나 또한 산 증인이라 말할 수 있었다. 


조금은 어설퍼도 꾸미지 않은 진심들을 멋대로 나열한 이들의 손글씨가 진짜 내가 받은 선물처럼 여겨졌다. 이번에 받은 편지들도 아주 살짝만 부지런을 떨어 상자에 넣어둔다면 언젠가의 내가 열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곤 힘을 주어 꾹꾹 써내느라 아팠을 누군가의 손가락 한 마디와 뻐근한 목 근육을 떠올리며 또다시 미소를 지을 거다. 그 종이 몇 장에 모든 우울이 손쉽게 녹아버리고, 세상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했다는 바보 같은 착각에 빠져 한참을 헤엄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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