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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금나비 Dec 12. 2024

빨간 채점 펜의 비밀

며칠 전에 막내가 빨간 채점 펜 안에 심을 사달라고 했다. 다섯 개야 한다고 해서 인터넷 쇼핑으로 몇 군데 찾아보았는데, 심으로 사려면 배송비가 들었다. 배송비가 안 드는 걸 쿠팡에서 골랐는데, 심만 따로 파는 제품은 없어서 4,500원에 펜 다섯 개인 제품으로 주문했다. 가격도 제일 저렴했고 로켓배송이라 단순 변심이라도 환불이 가능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다음날 물건이 와서 막내에게 기분 좋게 주었는데, 막내가 환불하라고 했다.


만 사라고 했는데, 펜을 사면 어떡해? 당장 반품해!”

만 파는 건 배송비가 들어서 비싸! 낱개로 다섯 개는 안 판단 말이야. 펜으로 사면, 안에 심이 들어 있는데 뭐가 문제야?”

“난, 심이 필요하지. 펜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헐, 너, 바보니?”

“엄만, 알지도 못하면서….”

“그럼, 말해봐, 그렇게 고집부리는 이유가 뭐야?”

“싫어, 안 알려줘!”

막내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지금 펜이 그리도 좋으면, 새로 산 펜의 심을 빼서 넣어서 쓰면 되는데 고집을 넘어서 아집이었다. 나는 막내를 설득하려 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펜을 다시 포장해서 반품할 수밖에….     


"내가 산 것보다 비싸면 안 사줄거야!"

“가위바위보 해?”

“왜?”

“내가 이기면 엄마가 사주는 거고, 엄마가 이기면 내가 커피 사줄게.”

막내는 나보다 가위바위보를 잘한다. 꼼수를 쓰려고 하는 거다.

“싫어, 엄마 스 커피 많아!”

“치, 암튼 반품해, 알겠지?”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그 펜을 쓸 것이 아니라서 반품해야 했다. 가지고 있다가 친구에게 선물하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도 싫다고 했다.      


“엄마, 심 다섯 개 사주라니까. 샀어?”

“네가 찾아서 사! 네가 원하는 건 없을 거야.”

“엄마 핸드폰 죠, 찾아보게!”

막내는 내 핸드폰으로 쇼핑을 열심히 하더니 골랐다고 했다. 심이 열 개에 13,800원이라고 했다.

“엄마, 요것 사!”

“내가 고른 것보다 값이 두 배가 넘어! 그런 걸 왜 사?”

나는 막내가 고른 걸 보지 않고 매운 것 먹은 것처럼, 화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려 냉수를 마셨다.


“심 다섯 개에 사천오백 원 넘으면 차액은 네가 내!”

“알았어.”

갑자기 머리에 띠 두른 화가 뚝 끊기며 멘톨 같은 시원함이 퍼졌다.

“웬일?”

나는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 돼 있었다.

“너, 학원 선생님이 준 거라 그렇지? 다른 펜을 사서 선생님이 준 펜과 섞이면 큰일이고.

“맞아, 내겐 소중한 펜이야.”

“그래서 심만 필요했던 거구나!”

“응, 선생님이 심 다 썼대. 그래서 사주려고.”


막내는 학원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선생님이 일주일 전쯤에 준 거였다. 가르치는 학생이 추천해 줘서 써봤는데 좋았다고 막내에게 한 개 준 펜이었다. 선생님이 알아서 살 텐데 선생님이 사기 전에 막내가 사주고 싶다고. 한 개에 천 원 하는 펜인데, 낱개 심이 천 원 했다. 넉넉히 다섯 개를 선물해 주고 싶은 막내의 마음을 읽으니, '이럴 땐 마음이 넓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막내같이 그랬을까?

“기특하네!”

“그런데 10개면 엄마가 고른 건 9,000원에 살 수 있는데, 13,800원에 사야 하니까, 네가 4,800원 줘야 하는데 그래도 살 거야?”

“응, 사 줘!”


막내는 피 같은 4,800원을 자기 용돈에서 수혈해서라도 사드려야 한다고 했다. 막내의 깊은 마음이 고집을 이겼다. 나는 막내가 고른 상품을 봤다. 낱개의 펜 10개에 심이 2개씩 들어있는 상품이었다. 내가 고른 걸 사도 되는데 굳이 다른 상품을 고른 걸 보면, 막내와의 생각의 차이를 다시 한번 느꼈다.      

“자기가 고르면 이유 없이 다 맘에 들지!”


나는 막내가 사고 싶은 건 엄마에게 부탁하지 말고, 합리적인 가격 안에서는 모든 걸 스스로 고르라고 해야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자녀마다 다 그런 걸 보면, 부모가 고르는 건 무리수다. 불필요한 선택권을 막내에게 주기보다는 스스로 찍어 쓰는 바로 티켓을 유도하는 게 낫다. 그러면 내게 고집으로 비치던 모습이 더 이상 고집이 아니고, 자기 결정권이 된다. 선생님에게 펜 심을 주고 싶은 막내의 사랑만이 남는다.

막내를 보며, 나는 마음의 빨간 펜을 잡고 동그라미만 채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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