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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꽃 Sep 23. 2024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단편 5)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람한 몸을 가리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사회자가 연단에서 인사한다. 늘어뜨린 귀걸이와 목걸이가 불빛에 반짝인다. 긴 헤어스타일과 작은 공간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예쁜 목소리가 시선을 앗아간다. 대학캠퍼스 작은 콘서트 홀에서 열리는 음악회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꽉 들어찬 무대는 공간의 협소함을 항변하는 것 같다. 시설물 관리자 아니랄까 봐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오프닝 곡이 분위기를 띄웠는지 사회자의 말에 휘파람이 일고, 웃음이 일고, 박수가 나오기도 한다. 오래된 친구인 장미 씨와 함께 참석했다.


한여름 밤의 우주 음악회란다. 매년 이맘때면 지역민을 대상으로 음악회가 열린다. 해가 지고 비가 내림에도 바깥 온도는 30도를 웃돈다. 실내는 다행히 에어컨이 가동되어 꿉꿉함이 음악 속에 묻히고 있다. 옆에 앉은 장미 씨가 무어라고 귓속말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녀가 신기해서 저 쳐다보랴, 사회자 보랴, 번쩍이는 무대 살피랴 바쁘다.


사회자가 커다란 덩치를 슬쩍슬쩍 흔들며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한다. 제 몸보다 큰 현악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다. 볼거리가 넘쳤다. 들으러 온 건지, 보러 온 건지. 이 더위에 옆에 앉은 장미 씨의 길고 풍성한 헤어스타일도 놀랍다. 불과 두어 달 만인데 콧대는 언제 저렇게 높였나. 


첫 무대가 시작되었다. 너무 가까워서일까.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머리를 두들겨 패는 것 같다. 두 눈이 동그래졌다. 번쩍번쩍 불빛에 간간히 장미 씨의 허연 피부가 드러난다. 까무잡잡했는데.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공연장 앞에서 만날 때부터 하던 장미 씨의 말이 떠오른다.


"정말 아무것도 한 것 없다니까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에 이렇게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어요."


콧대도 손댄 게 아니란다. 뷰티 숍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단다. 그러니까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콧날이 쫙 서고 피부가 뽀얘진 건 어느 날 갑자기란다. 장미 씨는 또 귀에다 대고 한마디 한다.


"시골 할머니 댁에서요. 한 밤 자고 일어났는데 이렇게 됐어요"


뭐래? 둥둥거리고 챙챙 거리는 음악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다가 조금 느슨해지고 경쾌해지는 음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음악은 귀에서 몸으로 내려왔다. 장미 씨도 나도 앉은자리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간간이 눈을 맞췄다. 어쨌거나 좀 있다가 밖에 나가서 우리 자세히 보자고.


"근대 넌 할머니 댁에서 자고 일어났을 뿐이란 말이지? 그럼 네 눈에 난 누구로 보여?"


귀엣말을 했더니 장미 씨는 무슨 말인가 하는 듯한 표정이다. 왜 아무도 못 알아채는 걸까? 나야말로 지리산 골짜기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여자가 됐다니까. 그것도 이렇게나 우아한 여성. 장미 씨와 나란히 앉아 들썩들썩 흔드는 어깨춤에 주위의 시선이 날아든다.


환상의 콤비다. 어느 패션쇼 무대에서 내려와 앉은 듯 장미 씨와 나의 긴 헤어스타일은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오뚝하게 선 콧날을 무대로 향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와서 두드리는지 음향이 부딪히는지 여전히 온몸을 때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그래도 기분은 천장의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그나저나 오늘 밤도 자지 않아야 한다. 이 음악소리에 그대로 녹아 저 우주로 날아갈지언정 한여름의 꿈을 깰 수 없다. 육중한 몸매의 짧은 머리 시설물 관리자로 돌아갈 수 없다. 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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