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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섬 '노도'

by 사과꽃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 김만중(1637~1692), 서포만필 -



'창선삼천포대교'를 넘은 시간이 오전 11 경이었다. 일요일 단출하게 나들이도 오랜만, 일부러 나선 건 몇 년 전부터 문학의 섬에 대하여 여러 번 들은 바 있어서다. 서포 김만중 어른의 문학관이 있고 작가의 집이 있다는 이야기는 매번 솔깃했다. 올해 2번째 구절초 축제가 있었고 이제 3~40% 정도 피었다는데 하얀 꽃 구절초에 대한 호기심도 컸다.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에 있는 유배문학관은 상주은모래해수욕장을 지나며 두어 번 간 적 있다. 유배문학관에서 서포 어른의 모습과 글을 보았기에 노도에 있는 서포 문학관은 큰 기대를 못했다.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에 있는 벽련항에서 배를 타고 5분여 정도 건너니 노도다. 바다 건너 육안으로 보이는 섬, 그 섬에 서포 김만중 어른의 문학관과 초옥, 허묘가 있었다.





서포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호란 중에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 씨는 궁색한 살림에도 자식을 위해 서책 구입에 값을 묻지 않았고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 손수 필사해 교본을 만들어 자식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한글 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는 그의 어머니를 위해지었단다. 숙종에게 희빈 장 씨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아 숙종의 분노로 유배된 어른이다. (Daum 위키백과)


그의 증조부는 문원공 김장생으로 성리학자이자 서인예학의 태두였다. 서포는 조광조에서 시작되어 백인걸을 거쳐 이이, 성혼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후에 김집, 안방준 등을 거쳐 송시열, 송준길, 윤문거 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서포 어른은 훌륭한 가문이라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때문인지, 주자주의에 대한 회의를 내비치기도 하고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함으로써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Daum 위키백과) 그 시기 조선은 당시 중국에서 조차 주자학을 멀리하고 성리학이 떨치던 시기였음에도 주자만이 살길이라고 다른 학문을 배척했으며 민생의 파탄을 외면시하던 때였다.



노도에 도착하여 조금 오르자 아담한 2층 건물이 나타났다. 김만중 선생의 생애와 문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노도김만중문학관이다. 문학관을 나와 길을 오르면 선생이 기거하던 초가집 서포초옥이 나온다. 그 위쪽을 오르면 구절초 언덕을 중심으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주인공과 안내판이 길을 따라 동판으로 설치되어 있다. 책을 읽고 동선을 따라 걸으면 그 느낌이 더 살아날 듯하다. 노도 산 정상에는 선생이 살아생전 늘 올라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는 정자(그리움의 언덕)가 있다.



문학관 내부와 계단에 선생의 글과 그림이 있는데 묘한 서글픔이 베어났다. 파직당하고 먼 곳으로 유배되어 병사하기까지 그리워했을 가족들과 그 생이 떠올라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그 시절을 주름잡던 이들은 모두 묻혔지만 선생은 유배길에서 내놓은 글들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점이다. 돌아오는 배에서 느리게 가는 엽서를 한 장 썼다. 1년 뒤에 나에게 오는 편지라는데 서포 어른의 생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작가 창작실(우측)


*작가 창작실은 총 3채로 신청(남해군 문화체육과 860-8623)을 통하여 접수받으며 3개월까지 묵을 수 있다. 문학의 섬 노도를 소개해준 전 남해군 문화체육과 담당 팀장 박정미님과 노도 관리인 정기평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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