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액정에 뜬 발신자명이 사라질까 잽싸게 화면을 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홀리듯 학원비를 결재한 후였다. 어쩌다 황소에 들어갔다.
23년 10월 말
3년간 다닌 소마 선생님께서 대형 수학학원 레벨테스트를 권하셨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셔틀버스와 맘카페를 뒤져 학원 리스트를 뽑았다.
교과 진도를 선행하는 판서식 대형학원
소수정예로 개별 진도를 꼼꼼하게 살피는 소형학원
쪼꼬미는 동기부여 시스템과 경쟁이 있을 때 불붙는 아이인지라 대형학원 위주로 알아봤다. 수학의 아침, 파인만, 수이, CMS. 심화는 3-2 현행, 선생은 5-1 약분과 통분을 이제 막 들어갔다. 마음속으로는 셔틀이 다니고 수업 시간대가 맞는 파인만과 사고력을 이어갈 수 있는 CMS를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정작 첫 레벨테스트는 그 유명한 생각하는 황소였다. 학군지에 살 때부터 9, 10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시험 보고 우수수 떨어진다고 익히 들었다. 이게 뭐라고 레테를 문의하는 것도 주눅 들었었는데 날짜마저 가장 빨랐다. 미리 연습 좀 시킬걸. 엄마가 미안하다.
쪼꼬미는 이미 충격적인 거절의 경험이 있었다. 신나게 나뭇잎 뜯으며 숲 유치원을 졸업하고 1학년을 다니던 중 친구들이 많이 다닌다는 영어 학원에 가고 싶어 했다. 애가 학원을 가고 싶다는데 고민할게 뭐 있나, 레벨테스트를 보려고 바로 전화했는데 레테 스케줄이 꽉 차서 한 달 후에나 테스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가 처참하여 폴리 문턱도 밟지 못했다.그때까지는 돈 내면 학원은 전부 다닐 수 있는 줄 알았다. 돈을 낸다고 해도 못 들어가는 학원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3학년 쪼꼬미는 그때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영어 레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편이다.
여하튼 정해진 기간에 황소에 전화해서 번호를 남기면 레테 등록 기간에 문자로 신청링크와 숫자코드를 보내준다. 대략 10월 말 접수 시작이며 공식 블로그에 자세히 나와있다. 시험은 전국이 같은 날 오전, 오후 총 2회 본다. 원하는 지점과 시험 시간을 선택하면 끝이다.
음 언제 볼지 날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튼짓이었다. 정해진 날짜에 가야 하는구나.
23년 11월 5일 일요일
학원 근처엔 도로 양쪽으로 불법 주정차가 만차였다. 30분쯤 여유롭게 도착했는데 부모님 손에 잡힌 어린이들이 모두 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어 저기가 생각하는 황소구나 싶었다.
건물 1층에서 선생님이 아이들만 엘리베이터를 태워 시험장으로 올려 보냈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파이팅을 외치던 엄마들, 그게 나다. 내 딸 수능 보는줄 알았다. 한 시간 전까지 피구공을 발로 밟고 뛰다 뒤로 넘어져 울고 소리 지르던 쪼꼬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시험을 볼까. 기다리며 커피라도 마셔볼까 했으나 드넓은 스타벅스는 이미 엄빠들로 만석이었다. 나 진짜 일찍 왔는데.
시험이 끝난 쪼꼬미피셜 대략 200명 이상이 시험을 본 것 같다고 했다. 오전, 오후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인원이다. 결과를 확인하니 전국에서 7,917명이 응시했다. 충격적인 것은 초3이 4,541명, 초2가 3,376명이나 되었다. 우리 딸 초2 때는 변기에 앉아 똥 닦아달라고 소리 질렀는데.
80분 동안 30문항을 보며 모두 풀었다고 했다.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게 성대경시도 100점 받은 것 같다고 소리치며 나와서 기다리던 부모님들 멘탈을 흔들어놨으나 실상은 수상하지 못했기에 늘 필터링이 필요하다.
쪼꼬미는 경시나 시험에 익숙한 편이어서 정답률과 무관하게 경직된 시험장 분위기에 익숙하고 문제에 따른 시간 배분에 능숙한 편이다. 여튼 다 풀었단다. 경시만큼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며 나오자마자 잊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소마 같은 반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반쯤 풀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점수가 비슷한 걸 보면 쪼꼬미 정답률, 정확도가 낮은 편이다.
11월 9일 목요일 결과가 나왔다.
가장 낮은 일품반 전국 커트라인이 21.6점이었다. 쪼꼬미는 21.8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다. 뒤에서 100등 안에 드는 셈이다. 운전 중 확인한 문자에서 일단 ‘합격’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 싱숭생숭했다. 빨간불에 걸려 자세히 확인하니, 합격했으나 대기 70번이었다. 12월 말까지 충원되지 못한다면 진도 관계상 부득이하게 시험을 다시 치르고 입학해야 한다고 했다. 아쉬움에 한숨 한 번 내쉬고 액셀을 밟았다.
황소 결과가 나오던 시간, 쪼꼬미는 파인만에서 레테를 보고 있었다. 4-2, 5-1 범위를 봤고 꽤 잘 나와서 5-2 혹은 영재관에 배정받았다. 물론 난 쪼꼬미를 알기에 일반 5-2를 보내야겠다 싶었다. 대충 꿀떡꿀떡 넘기는 아이라 개념 다지기와 여러 번 반복이 필수였다. 대기번호를 보니 황소는 물 건너갔지만 이만하면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파인만과 황소 결과를 말하자 내심 기대했었는지 얼굴에 아쉬움이 비췄다. 아차 싶었다. 결국 쪼꼬미 머릿속에 있는 황소, 파인만의 포지션과 이미지도 내가 만들고 주입시킨 것이다. 이 아이는 학원에 대해 아는 것은 이름과 시험 유형뿐인데 벌써 학원 별 줄 세우기가 끝난 것이다. 쪼꼬미가 스스로의 등급을 파악하고 내가 주입한 기준에 미치지 못해 스스로 실망하는 게 무서웠다.
수학의 아침과 수이 레테를 앞두고 여전히 5-1 진도를 나가느라 분주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집에서 5-1 기본+응용을 나가고 있으니 5-1 심화반 혹은 5-2 진도 나가는 반에 들어갔으면 했다.
11월 18일 토요일 오후였다.
전화가 왔다. 화면에 정확하게 ‘생각하는 황소’라고 찍혔다.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 후회하더라도 해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쪼꼬미에게 물었다. 일품반 문 닫고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설명이 채 끝나기 전에 황소에 간다고 신나서 폴짝거렸다. 9살 동생도 함께 공부하고 4-1부터 나간단다.
고학년 수학학원 생각하는 황소 일품반
정신없이 살다가 앞을 보니 쪼꼬미의 10살이 끝났다. 3월이면 고학년인데 쪼꼬미와 함께한 일들, 느낌, 교육에 대한 고민들이 모두 휘발되고 어렴풋이 잔상만 남아있다.
이 글을 쓰면서도 파인만을 먼저 봤나 헷갈려서 다시 확인했다. 추후 황소를 등록하고 알아보는 과정에서 찾아본 블로그, 카페 글 속의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잘해서 쪼꼬미처럼 일품으로 문 닫고 들어간 아이는 없고 심화, 경시, 9세 입학, 혹은 승급한 아이들뿐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쪼꼬미는 문 닫고 들어가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또 잊어버릴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딸을 위해 기록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