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심 없는 이들조차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스필버그 감독은 무수한 히트작을 갖고 있다. <죠스>, <인디아나 존스>, <더 포스트>, <에이 아이>, <터미널>, <라이언 일병 구하기>등 장르를 망라하고 수많은 성공을 거둔 감독이다. 그의 이름은 명실상부 하나의 아이콘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스티븐 스필버그의 유년기는 어땠을까. 어릴 적 소년은 어떤 지점에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심게 된 것일까?
한 번도 극장에 가본 적 없는 소년 새미는, 어두운 곳이 무서워 부모님 앞에서 투정을 부린다. 영화를 보다 무서우면 어쩌냐는 칭얼거림은 꽤나 현실적이다. 새미는 부모님의 다정한 만류로 결국 극장에 들어가고,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강렬함에 영화라는 세계에 금방 빠져든다. 그중에서도 새미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열차의 추돌 장면이다. 선로에서 튕겨져 나와 나뒹구는 자동차는 두려우면서도 도통 눈을 뗄 수가 없다. 새미는 완벽하게 그 장면에 매료되고야 만다. 새미는 그 장면을 다시 보기 위해 장난감 열차와 자동차를 부딪히게 하고, 그런 아이의 마음을 눈치챈 미치는 장난감을 고장 내는 대신 그 장면을 촬영해 계속 돌려 보는 게 어떠냐 말한다. 그렇게 새미는 촬영이라는 세상에 발을 디딘다.
새미는 점점 영화에 몰두한다. 자신의 카메라 안에서 탄생하는 모든 영상들을 깊게 사랑한다. 그 작은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리도 자신을 홀리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새미의 아버지 버트는 새미의 영화 만들기를 단순히 취미로 치부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은 알 수 있다. 영화는 새미에게 전부라는 것을. 얼핏 보면 새미의 삶은 참으로 순탄해 보인다. 귀여운 여동생들과 자유로운 엄마, 다정한 아빠로 이루어진 가족은 이렇다 할 문제가 없어 보인다. 또한 새미는 교내에서도 계속 영화를 찍으며 친구들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기도 한다.
문제는 삶은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거다. 미치의 엄마, 즉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미치는 우울에 잠긴다. 버트는 비싼 편집기를 사주며 미치를 위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새미에게 부탁한다. 그 사소한 부탁으로 새미는 소위 말하여 우스꽝스러운 패밀리 캠핑 무비를 찍게 된다. 새미는 그 영상을 편집하다 어떤 부분에서 일순 멈추게 된다. 반복하여 돌려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다. 새미는 그렇게 미치의 불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부터 삶은 가파르게 회전하고 삐걱인다. 새미는 엄마를 무시하고 원망하지만, 차마 그 얘기를 직접 할 수는 없다. 새미는 내 잘못을 알려 달라 호소하는 미치에게 자신이 편집하여 잘라낸 불륜의 장면들을 미치에게 영화처럼 보여주게 된다. 영상을 본 뒤 엎드려 흐느끼는 미치를 끌어안으며 새미는 말한다. “말하지 않을게요.” 그렇게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로 남는 비밀이 생겨난다. 그에게 생동감 넘치는 행복을 안겨주던 영화라는 매체가 새미에게 잊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것이다.
결국 새미네 가족은 오래도록 살았던 곳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그곳에서 새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지만, 동시에 첫사랑을 하게 된다.
허나 사랑은 그리 순탄하지 않다. 모든 이들의 첫사랑이 으레 그러하듯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내내 우울에 시달리던 미치는 이내 가족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확실히 표현하자면 버트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내내 베니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나는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이를 향한 부정한 사랑만 아니라면 미치는 다정하고 좋은 엄마이다. 무한히 내 꿈을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 그와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배신감을 안겨주는... 솔직히 말 해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자꾸만 어디론가 바람처럼 떠나버릴 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다. ‘엄마‘를 바라보는 ‘자식’의 시선으로 괴로웠던 것도 같다. 허나 미치가 버트에게 당신은 모든 걸 취미 취급 하잖아 라고 외칠 때 그녀가 겪었을 꿈에 대한 좌절들이 일순 쏟아졌다. 한 번의 손찌검이 마음에 박혀 용서를 구하는 미치를 어떻게 온전히 미워할 수 있을까. 그런 폭력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떠나겠다는 이를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을까. 버트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타인의 꿈을 고작 취미로만 치부할 때마다 그게 미치를 조금씩 갉아먹고 숨 막히게 하지 않았을까. 어느새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는 새미처럼 미치를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하는 노력은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니까.
새미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한다.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새미를 보며 버트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해 보라고 다독인다. 새미는 그렇게 영화사로 직행했고, 그곳에서 존경해 마지않는 영화감독 존 포드를 만나게 된다.
존 포드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새미는 폭발하는 설렘을 끌어안고 발을 옮긴다. 새미는 앵글 중앙에서 신이 난 채 걸어가는데, 이내 카메라가 지평선의 위치를 바꾸듯 새미보다 하늘을 비춘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영화가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영화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몰아쳤던 갈등과 고통을 모두 거친 뒤에도 새미는 영화라는 꿈을 잃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사에 기록될 감독이 될 것이다. 가슴을 아리게 했던 비극들조차 켜켜이 쌓여 성장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모두 지평선에 도달할 수는 없을 테고, 인생이 영화같이 달콤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꿈을 꾸는 한 그것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쉽게 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