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2일 농부가 깨달은 삶-2편
늦여름에 일군 땅은 천천히 가을을 맞고 순리대로 겨울이 이어졌다. 겨울 동안 산은 잠시 숨을 멈춘 듯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 잠시 숨을 멈춘 듯, 풍경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곧 순리대로 봄이 왔다. 봄이 오면 흙과 가까운 사람들은 몸을 놀려야 한다.
흙을 갈고 돌을 골라내고, 또 돌을 골라내다가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돌멩이가 있는 채로 밭고랑을 만들었다. 땅 속에는 정말 돌이 많았다. 농사는 씨를 뿌리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씨를 뿌릴 수 있는 땅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그걸 미처 몰랐다. 모르는 게 또 얼마나 많았던지. 아마 이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한 기록일 테다.
어설프게 땅을 만든 다음에는 차를 타고 면내로 나가 모종을 사서 심었다. 나도 남편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으므로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책을 찾아보거나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들께 전화해서 묻는 방법으로 농부 흉내를 냈다. 그전까지 내 머릿속에 농사란 '심고 싶은 작물을 떠올리고 그걸 사다 심거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키운다'가 끝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긴 하지만 직접 여정을 따라가다 보니 그 문장 속에는 생략된 부분이 빼곡했다. 뭔가를 심을 수 있게 흙을 만드는 일부터 작물에 따라 여기 심어도 되는지 따지는 일, 지지대를 세워주거나 잡초를 뽑아주거나 퇴비를 만드는 일까지 무엇하나 녹록지 않았다.
우리가 정리한 땅은 아무것도 없이 흙만 포슬포슬한 맨 땅이었다. 그 위에 키를 세운 듯 고추 모종이며 상추 모종, 토마토 모종에 가지와 오이 모종까지 줄이 섰다. 올망졸망하게 심어진 모종들을 보고 있으며 '논에 물 대는 소리만 들어도 배 부르다'라고 하시던 어른들 말이 떠올랐다. (이런 말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영락없이 시골에서 자란 사람) 일요일 밤에는 다시 집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농장 울타리 문을 잠그면서 돌아오는 5일 동안 저 식물들이 잘 견뎌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생명이란 신기해서 자리 잡을 틈을 조금만 만들어주면
매 순간 뿌리를 뻗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5일 동안, 우리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해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일상에 몰입했던 만큼 농장에 남겨진 식물들도 자신의 삶에 몰입했다. 봄 햇볕이 쏟아졌을 테고 어떤 날에는 비가 내렸을 테다. 돌아오는 주말, 농장에 도착하면 나는 눈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심어둔 모종들이 몰라볼 만큼 부쩍 자라 있었기 때문이다. 주 2일 동안 다시 흙을 만지고 물을 주고 멀대처럼 서서 해 지는 걸 보고 이른 새벽에 새떼들이 날아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아이들이랑 다람쥐 찾는다며 산책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덩달아 내 일상에는 우리가 자리를 비운 5일 동안 빼곡하게 자라난 이름 모를 무수한 식물을 마주하는 일이 덧붙여졌다.
분명 이 땅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씨앗을 뿌리거나 심은 건 당연히 아니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씨앗이라기엔 끊임없이, 다양한 식물들이 땅 위로 솟아났다. 대부분은 이름을 모르는 것들이었는데 어떤 건 봉숭아거나 분꽃이었고 또 어떤 건 민들레였다. 대체 얘들은 언제부터 이 땅 속에 숨어 있었던 걸까. 이 땅 속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어떤 씨앗이 숨어 있는지 나는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적당한 온도가 되고 햇볕이 쏟아지면 땅 속 어딘가 있는 씨앗들이 하나둘씩 발아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내가 서 있는 이 한 뼘짜리 땅 속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남편도 모르고 우리 중 그 누구도 모른다. 물을 주고 햇볕이 떨어지고 적정한 온도가 되어야 그 안에 있는 무엇이 솟아난다. 그제야 아 이 안에 민들레가 있었구나, 봉숭아가 있었구나 혹은 그 무엇이 있었구나. 깨달을 뿐이었다.
그 생각 속에서 나는 내 삶을 떠올렸다.
아주 오래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 바람을 쫓아 대학교엘 갔고 그 속에서 나는 소설가가, 작가가 되지 못하겠다는 절망을 했다. 어쩌면 내게 재능이 없다는 고리타분한 핑계 때문이었을 수 있고 내가 쓴 글을 애정도 없이 읽고 합평하는 사람들에게 데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글 쓰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글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빨리 달아나고 싶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수업을 듣고 가장 열심히 과제를 하며 조기졸업을 했다. 졸업한 뒤에는 아무 곳에나 취직했고 묵묵히 일하며 살아왔다.
내 땅에서 어떤 나무가 싹을 틔운 적이 있다. 그 싹이 자라서 작은 묘목이 되었을 때 나는 그 나무를 스스로 꺾었다. 내 땅에는 더 이상 어떤 나무도 자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속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으니까.
내게 재능이란, 어떤 씨앗이란, 되고 싶은 무엇이란 없다고 아주 오래 생각했다. 나이가 들었고 이제 무엇을 꿈꾸기엔 이른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 내 앞에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한 뼘짜리 땅이 놓인 것이다.
이 땅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도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안다고 생각했던 건 나의 큰 오만이었다. 어떤 빛나는 잎사귀가, 어떤 향을 가진 꽃이 이 안에 들어 있는지는 나도, 당신도, 신도 모른다. 그걸 알 방법은 그저 물을 주고 적당한 햇볕을 쬐여주고 알맞은 온도가 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는 것뿐이다. 어쩌면 이 안에 물푸레나무 씨앗이 혹은 우담바라 꽃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까지 물을 주고 적당한 햇볕을 쬐여주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무엇이 있는지 모를 뿐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고, 가보지 못했던 곳도 가보며 내 땅 속에 숨은 씨앗이 발아되길 기다려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만의 땅이 있다. 땅에서 올라오는 무수한 식물들을 목격한 뒤부터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나와 함께 일하는 후배를 볼 때도 '저 아이가 지금 이 작은 일조차 제대로 못해서 실수투성이일지 몰라도 저 아이 속에는 내가 모르고 본인도 모르는 대단한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계속 기회를 주고 그 씨앗이 발아되도록 물을 줘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나에 대해서도 '내가 모르는 씨앗이 내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고 여겼다. 그 뒤로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해보지 않은 일을 맡게 될 때 갖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내 안의 어떤 세계가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도.
쉽게 내 삶을 단정하지 말고, 쉽게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지 말고, 쉽게 변두리로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삶의 어느 온도에서 싹이 갑자기 올라올지 모를 일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오늘도 물을 부어주고 햇볕을 쬐여주길, 간절히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