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런던 매치(토트넘vs아스날) 관람 후기
'야 손흥민 우리 선배님이자나~' 고등학교 동창들과 술 한잔 할때 나오는 단골 농담입니다. 사실 완전 거짓말은 아닌게, 손흥민 선수가 제 모교를 짧게 다니고 독일로 유학을 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급식실에서 한번 쯤 마주쳤을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하튼, 어느덧 월드클래스가 된 손흥민 선수 경기를 직관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생때는 돈도 없거니와 여름방학은 프리미어리그 휴식기이기때문에 기회가 없었고, 대학원생때 학회로 런던을 다녀왔지만 역시 경기 스케줄과 일정이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톡홀름에서 런던은 비행기로 2시간 반이면 가기때문에 (서울-부산보다 짧다!), 여기서 일하게 된건 아주 큰 기회였습니다.
원래는 느긋하게 이번 년안에만 다녀오려했지만, 급작스럽게 2월 한국 귀국이 결정되면서 (이유는 나중에 따로 올리겠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토트넘 경기 빨리 예매해야겠다!' 였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게 일찍일어난다고 벌레를 꼭 많이 잡아먹지는 못하지만, 늦게일어나면 확실히 적게 잡아먹습니다. 부랴부랴 1월 경기 티켓을 확인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티켓은 다 매진이었습니다. 토트넘은 조금 얄미운게 회원권을 구입해야 잔여 티켓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말인즉슨, 회원권을 구매했는데 자리가 없다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것입니다. 제 선택지는 2개였습니다 (1) 회원권 가격이 손선배에게 갔다 생각하고 기분좋게 포기한다 (사실 기분 안좋음) (2) 비싼 자리라도 투자라 생각하고 예매한다
저는 1시간 가량 고민 끝에 (2)로 결정했습니다. 살면서 제가 언제 손선배 경기를 보겠습니까. 결국 소나타 사려다가 에어버스 산다고 이왕 비싸게 주는거 토트넘vs아스날 빅매치로 시원하게 질렀습니다. 공식사이트 파는 재구매 티켓으로 가격은 35만원 정도였습니다. 뒤에 더 얘기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돈은 하나도 안아까웠습니다. 좌석은 3층이었는데 뷰가 워낙 훌륭해서 경기 시작 전에 이미 돈 생각은 사라지더군요. 혹시 토트넘 직관하려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순서를 설명해드리면, 공식홈페이지에서 멤버십 구입 > 티켓 구입 (인기 경기라도 계속 새로고침하면 1자리는 충분히 건질 수 있음) > 메일 영수증 확인 > 경기 1주일 전쯤 애플지갑 경기티켓 활성화 (메일옴) > 경기장 가서 스캔하면 바로 입장 가능.
지금부터는 직관 후기입니다. 우선 세븐시스터즈 역(한국인들 많은 그 세븐시스터즈 아님)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경기장 근처 정거장에서 내립니다. 이제 경기장까지 걸어가면되는데 가는 길은 상당히 문화컬쳐입니다. 평화롭게 경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고성과 함께 과장된 몸짓을 하는 훌리건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도 충분한 수의 경찰들이 배치되어 큰 걱정은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변 잘 살피는게 중요할 듯). 아래 그림처럼 훌리건 무리를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무서우면서도 엽기적입니다.
이렇게 한 10-20분 정도 걸으면 경기장에 도착합니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서 처음 든 생각은 '와 너무 이쁘다'입니다. 아래 그림이 그때의 제 기분을 충분히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4시30분 시작 경기였는데 1시30분부터 입장 가능하므로 시간이 되시면 일찍 입장하여 선수들 구경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저는 비행기시간때문에 30분 정도 일찍 입장했는데 그래도 좋았습니다. 기념품 샾에 들려서 토트넘 목도리 하나 사서 둘렀는데 더 응원하는 맛이 나더라고요 추천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 토트넘 유니폼은 너무 안 이뻐서 차마 사지 못했습니다 (형광색 제발 뺴줘...).
경기는 0:2 아스날 승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다지 토트넘 팬은 아니기때문에 (갑자기 태세전환) 공 이쁘게 차는 아스날 선수 플레이 보는 것만으로 즐거웠습니다. 직접 보니 왜 아스날이 현재 1등 중인지 바로 알겠더라고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토트넘 선수들은 공을 뺐어오기 급급했습니다. 토트넘 경기력이 워낙 안좋았어서 팬들의 다양한 욕설을 4D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영국 영어 악센트 덕분에 더 또렷하게 들리더라고요. 그리고 나름 영어 회화 연습에 도움이 됩니다. 제 뒷자리 팬은 토트넘 선수가 공을 쉽게 뺐길때마다 "Why they give the ball so cheaply!"라고 워낙 좋은 발음으로 소리쳐서 이 문장은 확실히 외웠습니다. 다행히 제 양 옆은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분들이셔서 토트넘 선수가 실수해도 허허 웃으시며 순수하게 즐기셨습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내내 욕하다가 경기 끝나니까 자기들끼리 웃으면서 맥주마시러 가더라고요. 우리나라에 코인노래방이 있다면 런던에는 프리미어리그가 있구나 느낌이었습니다. 토트넘이 이기면 선수들이 홈팀 관중석으로 와서 더 인사하다갈텐데 너무 확실히 져서 그런지 다들 터덜터덜 락커룸으로 들어가더군요.
마지막으로 아래 동영상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건 현장의 생생한 응원 분위기입니다. 처음에는 "위어백" "위어백"으로 들어서 우리가 돌아왔다는 뜻인가? 했는데, 찾아보니 토트넘 응원구호인 "Yid army!"였습니다. 사실 뜻은 생뚱맞게 유대인 관련인데 아마 그냥 전통적인 문장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이 미친듯이 응원하는데 직접 현장에 있으면 일종의 전율이 흐릅니다. 심지어 저는 그 에너지를 느끼고 과장좀 보태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혹시 인생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직관 추천합니다.
+ 다음날 게트윅 공항으로 가는 길에 토트넘 목도리를 하고 가니, 아저씨들이 저만 보면 yids army를 외치시는게 너무 웃겼습니다. 심지어 몇 분은 저한테 와서 본인도 토트넘 팬인데 어제 져서 너무 아쉽다. 너 설마 그 경기 하나 보러 런던온거니? 다음에는 꼭 이길꺼야 또와하시는데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정말 크게 실망한 척 연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의 세상은 분노와 차별로 그득하지만 오히려 세상은 생각보단 따듯하고 신난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는 짧은 여행이었습니다.